조반 먹은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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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지혜롭다” 는 의미는 때와 장소와 상황을 안다는 말입니다.
흔히 눈치가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이 지혜는 누구에게나 요청됩니다.
1) 불통.
지혜가 없어 눈치도 없다면 주변사람과 불통이 일반적입니다.
설 때에 내려갈 것이냐 올라올 것이냐 부터, 어른들께 어떻게 인사하며,, 자녀들에게 무엇을 덕담할 것인가, 요즘의
직장인들은 인간관계가 어려운 나머지 챗지피티에게 묻는 답니다.
이런 대세라면 세배 돈과 결혼 축하금은 얼마나 내야 하는지 챗지피티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이때 잘못하면 본의 아니게 상처를 받거나 주고, 결국 평생 불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장성한 자녀들에게 부모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결혼과 혹은 취업을 묻고,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점수도 묻습니다.
그러나 가장 잘못된 일이 있다면 모처럼 내려온 명절 때나 식사 때 묻는 것이랍니다.
물론 묻는 입장에서는 얼굴을 마주하니 궁금해서 묻는다지만,,상대에게 가장 예민한 것을 물을 때에는 때를 봐서
지혜롭게 물어야 합니다.
또 묻는 말 내용과 말투입니다.
남하고 비교하거나 자신의 경험을 반추시킨다면 잔소리가 됩니다.
벌써 이쯤되면 상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데,, 불난 집에 휘발유를 끼얹는 식으로 비난과 고성이 나오면,,피차에게
원치 않는 파국이 옵니다.
이런 일은 우리 문화에서 흔히 겪는 혼란입니다.
밥 먹을 때는 조용히 밥 먹는 문화인데, 갑자기 서양인처럼 밥 먹으면서 말을 하자니 어렵습니다.
더욱이 일상의 대화가 아닌 심각한 주제라면 준비가 없는 경우라서 곤란해집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삼가해야 합니다.
주님께 배우셔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위한 모든 상차림을 하셨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누가 보아도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말씀 보다는 그들을 격려부터 하셨으니 배려입니다.
요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앞서 제자들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 후 제자가 아닌 어부로서의 삶을 이루고 있으면서 고기도 못 잡던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시장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때에 주님은 오셔서 아무런 책망 없이 피운 불에 떡과 고기를 구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일을 성경은 간단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들이 조반을 먹은 후에” 하실 말씀은 많으셨지만 때를 맞추신 줄 믿습니다.
2) 조반을 먹은 후에
금강산 구경도 식후에 해야 좋습니다.
배고프면 짜증이 나고 기운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조밥을 먹인 후에 밥상머리교육에 들어가셨습니다,
선두의 법칙으로 제자 중 맏이가 되는 베드로에게만 물으셨고 답을 받으셨습니다.
일종의 책망인데 책망스럽지 않게 본질을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3번 배반했기에 동일하게 베드로의 정곡을 3번이나 건드리신 줄 믿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옛날을 상기시키셨는지,,15절)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
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
로라,, 반석, 요1:42)
주님은 이 요한의 아들을 게바 즉 반석으로 세우시길 원하셨으나 지금은 조약돌도 못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주님은 책망보다는 추억으로 소환하시면서 다시 소명을 주셨습니다.
“15절) 내 어린 양 먹이라”
“16절) 내 어린 양을 치라(돌보라)”
“17절)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소명은 불러주신 이의 율법이나 명령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사랑의 태도입니다
사랑은 힘으로는 강인하고, 책임으로는 성실하고, 신앙으로는 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명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기에 이르도록 하나님 사랑합니다.”입니다.
그러나 말세의 특징은 다 소명이라지만 참 소명인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화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희생이고 인내이고 소망인데,,풍요와 형통과 번영의 소원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려우면 그만두곤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3번이나 확인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애국자들의 공통점은 자기 희생이 절대적일 뿐 호의호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방이든, 통일이든, 발전이든, 애국적 소망을 갖고, 주어진 일에 최선으로 하며 인내했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란,, 주님 기뻐하시는 일에 희생이 따르고,,소망이 있기에 인내합니다.
설 연휴에 한 방송을 보았습니다.
요리사들이 자신의 가치와 기술과 친절과 시간을 음식에 갈아 넣는 모습이 감동이었습니다.
이유는 미슐랭 1스타가 목표였습니다.
국가도 아닌 외국 타이어회사의 평가를 위해 최고와 최선으로 침노했습니다.
이 방송을 보면서 문득 목회자인 나는 어떤가 했습니다.
예배는 최상인가,,설교는 최선인가? 교우들에게는 주님의 마음이 있었나?
하늘이 상급을 믿고 소망하면서,,몇 날을 생각하며 반성했습니다.
3)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의 동일한 질문에 베드로는 민망히 여기면서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했습니다.
베드로의 인간성과 믿음이 동떨어지지 않은 화답이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성이 좋으면 믿음은 떨어지고,
믿음이 좋다면서 인간성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믿노라 해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으면 인간성도 좋아야 합니다.
또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찾고, 생활의 안정을 기도하며, 자손들의 번영을 소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만 멈춘다면 곤란합니다.
다른 종교인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녕 다릅니다.
마음이 평안 보다는 인간성의 성장과 성숙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변화되었다,,좋아졌다,,가족이 화목되었다,,” 하는 관계의 발전이 있어야 합니다.
청산유수로 기도하는 장로님이 사기죄로 감옥에 들어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가난해도 주변에서 신임 받을 수 있어야 하며 “역시,,” “다르네,,” 가 있어야만 합니다.
성도는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며, 또 의식하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성도 좋고,, 믿음도 좋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바는 십자가의 도이지만,,이 본질 외에서는 사랑으로 감싸는 덕이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3돌이 안 된 아기들도 자기 소원이 있고 안 되면 떼를 쓰면서 우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도 우
리에게 소원이 계심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그 소원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만큼 변하지 않는 소원은 딱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과 둘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사람은 고쳐서 쓰는 것이 아니라” 고 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이런 일이 많습니다.
결론) 곧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어야 합니다.
수고롭고, 지치고, 낙오된 삶에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신 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을 누리며 또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베드로처럼 반석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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