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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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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6-03-01 15:05 조회 3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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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와 늙은이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흔히 힘과 지혜의 차이라지만 실제는 죽음에 대한 차이가 큽니다.

늙어서는 죽음을 자주 맞닥트리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 죽음

주님은 베드로를 행해서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한마디로 젊어서는 마음대로 살았으나 이제는 어렵고, 늙어서는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한다.

특별히 너는 사람들의 강요에 의해 팔 벌리고 죽는다,,는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베드로의 죽음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에는 주님처럼 십자가 처형이었는데,,베드로가 주님처럼 똑바로 매달려 죽을 수 없으니 거꾸로 매달려

죽겠다 해서 그렇게 처형 당했답니다.

자기 죽음에 대한 저항이나 비련이 아닌,, 자원하는 순교자의 믿음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사람은 사는 날 동안 자기 의지가 중요합니다.

어린 아기들도 의지가 무시되면 울면서 떼를 씁니다.

이 의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심지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의지대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목적대로의 출생을 말씀합니다.

반면 죽음은 의지대로도 됩니다.

자살이 그렇고 목적 있는 죽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죽음이 베드로의 의지와는 무관한 죽음임을 예고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죽음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룬 후 천국으로의 초청이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이상한 게 있습니다.

어떻게 죽을 지는 말씀하셨고,,“ 팔 벌리고,,”

언제 죽을 지도 말씀하셨는데,,“ 늙어서는,,” 그런데 왜 죽는 지는 빠졌습니다.

그 이유를 알만한 말씀이 있습니다.

22절)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주님을 따른 댓가입니다.

그러나 형벌이 아닌 상급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 인가요?

주님에 의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궁금하게 여긴 곁의 사람은 요한입니다.

제자 중 가장 어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위에서 어머니를 의탁한 사랑의 제자입니다.

그가 훗날 요한복음은 물론 요한1,2,3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베드로 보다 더 산 이유가 됩니다.

특별히 같은 어부출신이자만 베드로에 비해서 글도 잘 썼습니다,

 

베드로는 어떤가요? 최고 연장자면서 다혈질이고,

글 보다는 행동하는 행동파로 볼 수 있는데,, 말고의 귀를 자른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주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시기에,,

같은 사랑하는 제자들이지만 용도가 다르고 그 사용 년한도 달랐습니다.

 

2)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이 궁금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자세한 설명 보다는 강력하게 명령하셨습니다.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앞에서도 “너는 나를 따르라”

 

제자들인데 “너희는 나를 따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 모두는 언제나 각자가 주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아간이 전쟁에서 탈취물을 훔친 사건이 나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난리 통에서 죽느냐 사느냐 했는데,,하나님은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 아간의 도둑질

을 아시고 처벌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무엇이든 심는 대로 구원 받고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고 심판이라 믿어야 합니다.

갈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

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

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문제는 주님을 따르는데 산책 차림으로 그냥 가벼운 따름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데 있습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일종의 부담인데,, 평생의 누가 대신하지 못하는 부담입니다.

 

얼마 전 동계올림픽이 마쳤습니다.

선수들이 수고와 희생이 각광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스노우의 보드는 위험천만한 운동인데 그 위험을 이기고 해냈습니다.

소수는 꿈을 이루었으나 다수는 눈물을 다시 삼켜야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시선과 마음을 갖고 산다면 이 둘의 모습이 다 마음에 들어와야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나에게 “나를 따르라” 하신다면 어떨까요?

주님의 말씀대로 자시를 부인한 후 십자가를 지고 평생 주를 따랐는데 호의호식은 커녕, 나 죽고 싶을 때 곱게 죽지

도 못하고, 남들이 억지로 팔 벌리게 해서 죽는 죽음이 상급이라면,,어떨까요?


그러므로 부르실 때에 보장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신25: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수고한 짐승도 대가를 받아야 하다는 보상의 원칙인데 이는 소를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땅에서 보상이 좋을까요? 하늘에서 보상이 좋을까요? 실제 땅과 하늘에 다 예비되어 있습니다,

잠1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우리나라 뮤지션 중에 “악동”이 있습니다.

남매인데 몽골선교사님 자제들입니다.

이 선교사님은 찬양단의 리더였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셨고 자비량선교로 몽골을 나가셨는데 곧 선교비가 그쳤습니다,

이때 이 남매가 국내에 소개되고 인기를 얻어 지금 11년 동안 선교 후원자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 자리에서 부름을 받습니다.

여기에 확인 할 바가 있습니다.

* 주님의 은혜에 빚진 자의 심정이 있는가?

또한 주님을 위한 은사가 왔는가? 혹은 함께할 자가 왔는가?

내적 부름과 외적 부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성도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요한을 궁금해 하자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은 쉬엄쉬엄 이나 소일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형편과 성품과 은사가 다르듯이 믿음의 질도, 격도, 성질도 성격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함께하며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는 삶의 현장에서 정체성을 나타내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결론) 여기서 참고할 조사가 있습니다.(기독교 윤리실천운동 제공)

전도의 문제가 교회의 불신이 큰 탓으로 나왔는데 문제는 매년 실추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75.4%), 2023년도는 (74%) 였습니다.

2008년부터 올해까지 총 8차례 조사에서 가장 높은 불신율입니다.

반면 긍정은(19%)인데,, 매우 신뢰한다(4.2%), 약간 신뢰한다(14.8%)

 

불신의 이유는 목회자의 교회이익 우선태도, 정치적 발언 및 집회참여, 나만 옳다는 태도 등이었습니다.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는 윤리와 도덕 실천(58,6%) 봉사 및 구제(19.4%) 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터전은 세상이지 교회 안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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