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고, 없고,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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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는 왕의 배려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감개무량했을 것입니다.
왕은 느헤미야가 원하는 대로 통행에 편리한 조서를 내주고, 군대장과 마병도 내주었으니 느헤미야는 왕의 사신으
로 행차한 아주 드문 일이였던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일이 이미 예정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천사가 우리를 돕고,
훗날 천국 입성할 때 천사들에게 받들려 입성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 자녀된 특권입니다.
주변을 보면 긴 여행에서 돌아온 경영자가 회사부터 갔다는 뉴스가 있습니다.
경영자로써 경영을 위한 그의 첫 행보였지만 당연지사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도착 3일 만에 야간 순시를 했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에 순종이었습니다.
느2:12)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
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이는 무엇인가 보면서 느끼게 하신 하나님의 조치라고 믿습니다.
느2:13)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본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
고 성문은 소화되었더라
역사를 보면 왕은 자신이 순시하거나 혹은 어사를 시켜 암행순시를 시켰습니다.
일종의 시찰인데 목회도 그렇습니다.
듣기도 하지만 보기도 해야겠기에 심방을 하는데 요즘은 시대의 변화로 성도들이 사양합니다.
그러나 지도자에게는 꼭 필요한 덕목이고, 행정이며, 정치입니다.
보는 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관광할 때의 觀, 견학할 때의 見,,
그러나 차이가 있어 숲을 보는 안목과 나무를 보는 안목인데,, 두 눈인 만큼 두 가지를 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970년대 군대는 구타가 많았습니다.
계급을 초월해 장교들도 심했습니다.
우리 소대장은 전역을 앞둔 고참 대위였지만 종종 내무실로 출근하여 밤중에 있었던 상황을 살피곤 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들었던 대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저앉기 보다는 일어났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느2:13)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체념이나 포기입니다.
마귀가 잘 쓰는 무기이기도 합니다.
느헤미야서를 연속적 설교하는데 3주간의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그 전의 일이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성경이 미끄러지면서 타자한 것을 순간 다 날린 탓에 포기하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고비를 넘어섰기에 다시 치면서 특별한 감동을 경험했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지금은 느헤미야서가 아닌 다른 본문으로 설교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가요?
어느 여 교수는 작성한 논문의 노트북을 차에 실었다가 차를 도둑맞았습니다.
세상일이 이런 경우가 흔하고,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포기나, 체념이 여기서 나오고 명분이나 실용을 구실로 반대도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에게는 왕을 앞세우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가 먼저 왔습니다.
느2:20)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한마디로 이런 사람은 어디나 있는데,,
하나님 일에 있어서는 명분이야 어떻든 반대는 불신앙이고,,불량한 사람이 맞습니다.
이들이 왕을 위한다지만 거짓일 뿐 진짜는 자신의 입과 배를 위함입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사람답게 이런 사람의 속을 간파하고 선포한 것이 참 믿음직합니다.
느2:20)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방법의 차이로 갈등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도 하기 전에 못하게 반대하는 일은 나쁜 짓입니다.
여기에 느헤미야가 외치면서 강조한 말이 있습니다.
"그의 종 우리가 건축하리니"
즉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만큼 방해하면 너희는 마귀가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멋집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처럼 해야 합니다.
결과를 보십시오, 시작부터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복이 주어지질 않기에
“없고, 없고, 없느니라” 선포했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지금도 여전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며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이어서 입니다.
그러나 감사와 순종은 믿음이 됩니다.
그 결과는 "있고, 있고, 있느니라" 가 될 것입니다.
찬송가 384장1절)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
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
라
요약합니다.
* 땅의 수고에는 하늘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잠13;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문제는 놀부처럼 보상만을 먼저 바라느냐
아님 흥부처럼 제비다리를 고쳐주는 성과가 먼저냐 입니다.
성도는 떡을 위해서 사는 일꾼이 아니라 떡을 주시는 주님을 위한 일꾼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차이가 어디서 오나요? 은혜를 아는 지식에서 나옵니다.
주님의 은혜에 빚진 자임을 알 때 자원함이 옵니다.
그래서 맡은 자들이 구할 것을 충성이 됩니다.
* 거룩한 길에는 방해가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 유혹이 있었습니다.
이후 마귀의 유혹과 훼방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출애굽을 방해한 것을 보십시오.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베드로가 죽지 못하게 가로 막은 것을 보십시오.
다 위한다는 명분을 갖고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자기 편함이나 유익을 위함입니다.
지도자는 이런 분별력과,, 나아가 타협하지 않는 강인함도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타협, 피함, 포기, 좌절 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다릅니다.
제 5의 방향을 향합니다.
출17:11~12)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
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홀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
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이 믿음은 학교에서 교과서로 수학을 가르치기거나 배우듯이 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자전거를 배우듯이 몸으로,,터득하는 지혜이기에 신학이 아닌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때야 할까요? 제도나 전통을 붙들기 보다는 실천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도는 거듭난 주님의 제자이기에 주님이 말씀하시고 사셨던 덕성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여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대제사장에게 여호와께 성결 강조하심,
충성되어라.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주께 하듯, 주님이 하시듯이 하라,
신뢰받아라.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라, 주변으로부터 내가 신임 받아야 참 믿음답다.
의리있으라,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자족하여라, 부자 되기 힘쓰기 보다는, 풍부와 궁핍에서의 일체의 자족을 배웠노라
결론) 위의 덕성을 함축하면 믿음 소망 사랑이고,,더 함축하면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 마음이 합한 자를 찾으시는 줄 믿읍시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찬송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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