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부르짖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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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은 “그 때에” 로 시작됩니다.
앞의 모든 상황과 연결된 현재의 상황인데 세상사가 온전할 수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경계하며 공사에 열중하다 보니 백성들이 유다족을 원망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했는데 다 힘들고 가난해서 발생한 일입니다.(느1~5절)
사도행전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행6:1) 그 때에 제자가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
파 사람을 원망하니
교회가 한참 “으샤으샤” 하며 일어서는데 문제의 바람이 불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즉시 조치에 들어갔었습니다.
그 이유를 자신들의 부덕의 소치로 여기고,,
자신들이 본래의 직무에 충실하도록 일곱 집사들을 세워 구제에 전념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노했으나,, 깊이 생각한 후 이웃을 외면한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었고 또한 느헤미야 자신부터 삶의 모
양을 고쳤습니다.
느5:10)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
치자
모든 설득력은 여기서 나옵니다.
진정한 리더쉽인데 스펙이나 웅변이나 책망이 아닌 모범인데,, 곧 투명과 희생이었습니다.
느5:14) 또 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부터 제 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렇다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산 입에 거미줄 칠 수 없으니 최소한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느5:15)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았
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느헤미야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일은 몰라서 못한 것이 아니고 궁핍이 좋아서 택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오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악에서 떠나 의에 살았던 것입니다.
신기하게 이런 일은 모르는 듯해도 주변이 알고 칭찬하거나 욕하며,, 또 닮기도 합니다.
과거 불량 총독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니 그 종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종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느5:16)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
며
백성들에게 착취하는 일과 반대로 덕을 세우는 일,,사실 얼마나 큰 차이인가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이런 모범을 지녀야 합니다.
이럼이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유산이고, 기업가는 직원들에게 전도이며, 교회도 주님의 몸된 소명을 이루는 일
입니다.
실제적으로 믿음의 가정이나 믿음의 기업이란 무엇인가요?
성경적 이름이라서 인가요? 교회 다녀서 그런가요? 아님 예배가 있어서인가요?
이것만이 아닌 악에서 떠나 의를 이룸이 있어야 합니다.
세금도, 임금도, 헌금도, 거래처와의 거래대금도 투명하고, 안전법 준수와 외국인 노동자 인격도 우대하고, 임금착
취나 바가지는 근절해야 합니다.
결국은 자기 머리위에 꽃을 피우는 일이고 후손들의 미래를 닦아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느5: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이런 삶, 이런 인격, 이런 신앙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만큼 담백해서 언제나 열린 문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자신이 먼저 압니다.
그러나 외식했던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못했기에 금식하며 하나님께 나아갔어도 믿음의 담력이 없어,, 어떤 응답이
나 은혜를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리더쉽의 목표는 달라도 목적은 딱 두 가지입니다.
섬김이냐? 군림이냐? 언제 어디서나 동일합니다.
주님은 섬기려 오신 분이셨습니다.
누구든 그 생명을 영접하면 온유하고 겸손하여서 주님처럼 닮는 줄 믿습니다.
어떤가요? 누구든지 크고자하며 먼저 낮아져야함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주변의 소리를 잘 듣는데서 시작됩니다.
칭찬이나 아부가 아닌 신음과 기분 나빠도 비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요점 -
* 하나님 경외는 바른 삶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칭 “나는 총독인지라” 하지 않고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했습니다.
자신의 삶의 근간이 신앙인 것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언제나 필요한 고백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가 이런 의미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는 무엇인가요?
마23:23~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
야 할지니라 맹인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심키는도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이 은혜의 법이 되어야 합니다.
무거운 신앙의 십자가가 가벼운 비결은 하나님사랑을 아는 길 밖에 없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사랑은 희생적 사랑입니다.
훗날 이 자식의 부모공경은 이 부모사랑을 알 때 비로써 가능합니다.
그러면 십일조만이 아니 더 큰 율법도 즐거운 법이 됩니다.
둘째는 정의와 긍휼입니다.
이 정의와 긍휼의 순종은 종교적이고 이기적인 금식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
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일이 아니겠느냐
주님은 제단에서 제물을 드리다가 형제와 다툰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화해한 후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배보다 화해와 평화를 강조하신 교훈 같습니다.
이는 예배를 무시한 교훈이 아니라 예배를 더 참되게 하신 교훈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렘7:1~9) 함께 읽어봅시다.
렘7: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라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라” 사람내면의 죄악이 놀랍지 않나요?
옛 이스라엘이 분단되고, 예루살렘성이 무너진 이유가 무엇인가요?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이 없었던 탓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불신이 계속된 반복이라는 점이고 그 핵심은 죄입니다.
렘5:30~31)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 것을 좋게 여기며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며” 민주주의가 위험함은 다수우선주의에 있습니다.
인권 우선으로 교권과 지휘권이 무너지고, 노동권보장으로 운영권이 무너지고, 국민권이 강하다 보니 헌법이 흔들
립니다.
총선 때 대형교회에 야당 대통령후보자가 예배하러 간다니 교회가 막아섰습니다.
최근에는 한 대형교회에서 73개 교단이 참여한 부활절연합예배가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모든 교단이 참여한 연합된 일이었는데 그만 유감된 일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예배 중에 대통령의 축사는 물론 정당대표들의 축사가 줄줄이 있었습니다.
축사가 기념행사나 집회라면 가능하지만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시간이기에 문제가 됩니다.
또 모 목사의 대통령환영사가 너무 나갔습니다.
결론) ‘하나님을 경외함’ 은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쓰면 삼키고 달면 삼키는 이런 모습이 아닌 진리와 함께하므로 공의가 늘 흘러야 합니다.
나단선지자는 다윗 왕 앞에서 죄를 지적해서 다윗을 회개하게 하였고, 세례요한역시 헤롯의 죄를 지적한 후 목이
잘렸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일을 환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재미를 보거나 손해 보지 않은 일이 아닙니다.
그 반대의 책임이 있는 일입니다.
이 특징은 진리와 복음에 대해서는 타협하고 이웃 사랑은 자기 사랑으로 대체합니다.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며 우리는 이런 모양에서 계속 돌이키는 성도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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