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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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는 파샤국의 파견 관리로서 12년 동안 유다 지방의 총독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파샤국을 다녀왔는데 전과 같지 않은 상황이 있었기에 다시 바로 잡는 노력을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죄의 관성이란 기회가 되면 어떤 명분이든지 앞세워 침범하고 갉아먹는 특성이 있습니다.
총독을 비웠던 그 1년,,무슨 일이 있었을까 마는 여러 일들이 있었습니다.
암몬과 모압 사람들과의 혼합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진작에 근절했던 것이기에 저들을 곧 다시 분리했습니다.
느13: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가운데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또 도비야라는 유쾌하지 않은,, 반대적인 원수의 일을 꾸미고 산발랏과 앞장 섰던 실세(?)가 성전 뜰 방을 차지했습
니다.
이는 괘씸을 떠나서 하나님의 모욕이기에, 느헤미야가 직접 나서서 방을 뺏어 "다시 그리로" 본래대로 했습니다.
느13:8~9)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
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같은 일을 두고, 그럴 수 있다며 방을 들였던 군상들과,,그 일을 심히 거부하며 방을 뺀 느헤미야는 같은 시대의 같
은 지역의 같은 민족이고 같은 신앙인 인데 이처럼 달랐습니다,
이는 성숙의 문제가 아니라 결의 문제였습니다.
잠언서는 이런 경우를 위해 많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본래 사람이 잘 잊는 존재라도 오랫동안 포로되어 갓 귀환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고작 1년 전에 광장 수문 앞에서
의 회개와 성벽 중수의 봉헌을 잊었다는 것이 낯설지 않습니다.
이제는 성전 봉사자인 레위인들을 박대했기에 제사가 홀대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느13:10) 내가 또 알아본 즉 레위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사람들
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왜 밭으로 도망했을까요?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아주 못된 짓이 있습니다.
기업은 열정페이, 교회는 소명페이,, 둘 다 착취의 고상한 거짓말입니다.
되레 기업은 격려페이,,교회는 은혜페이로 나누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안식일 준수가 해이해졌기에 바로 잡았고 근절된 통혼도 또 생겨 다시 세웠습니다.
느13:28) 대제사장 엘리아쉽의 손자 요야디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총독일지라도 대제사장의 손자를 쫓아내는 일은 자칫 저항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특히 산발랏의 사위가 되지 않았나요?
그러나 그는 그 역시 바로 잡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탄성을 불렀습니다.
느13:29)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
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
마지막으로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이 반열에 따라 각자의 일을 맡게 하며 예물도 정한 기한에 처음 난 것으로 드리게
했습니다.
흩어졌던 것을 다시 제자리로 옮겨 제자리에서 제기능을 하게한 것입니다.
누구는 이를 느헤미야의 개혁이라지만 부흥이 맞는 듯합니다.
개혁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이라면,, 느헤미야는 새로 뜯어 고침 보다는 다시 일으키고자 했기 때
문에 다시 흥한다는 부흥이 나을 성 싶습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파는 일이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새로움이 없어서 일까요?
아버지가 팠던 우물에는 물이 있다는 확실성 때문은 아닐까요?
현대는 자꾸만 덧칠하고 덧칠해서 본질을 잃는 유감이 있습니다.
감자탕에 깻잎을 많이 넣으면 깻잎탕이 되는데도 감자탕이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이고, 자본적인 것은 다 걷어치우고 다시 사도행전교회처럼 내 교회나 우리 교회가 아니라 성령
의 교회로 거듭나서 전 세계를 품고 미래로 나가야 합니다.
복음이 성경적 복음이고, 교회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물 중심이 아닌 성령중심의 교회가 되고, 목사 장로 성도도
계급이나 명예가 아닌 은사와 주의 부르심에 순복하여 지체로써 충성하는, 예배도 공연이나 강연이 아닌 하나님께
향한 열심이 특심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때가 올까요?
느헤미야는 그 소원과 수고가 있었기에 마침내 감동과 감사가 따랐습니다.
느13:31)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 요점 -
* 개혁에는 저항이 있습니다.
여의도시절 십일조를 하지 않은 젊은 집사들이 찬양대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가 되어 새해에 임명하지 않았더니 그 부모된 권사 장로들이 찾아와 불쾌함을 말했습니다.
이유를 말해주었더니 일부는 죄송하다 하고 일부는 얼굴이 붉어서 방을 나갔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는 그 자식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런 저항은 개혁과 부흥의 초기 증세입니다.
종교개혁도 큰 저항을 이겨냈기에 가능했기에 성공한 줄 믿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저해의 요소는 십일조와 금연과 금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옥균의 갑신정변이나 전봉준의 동학의 실패는 이 저항세력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차 무기를 들곤 합니다.
가장 큰 저항세력은 기존의 세력을 붙잡고 있는 세력입니다.
종교개혁은 교황청이었고, 갑신정변은 고종황제였고, 전봉준에게는 양반이었습니다.
이 일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2030청년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투표용지부족에 의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한 기업의 “탱크 데이와 책상위에 탁!”이라는 홍보는 대통령과 정치권이 하나되어 성토하고 불매하면서, 국민의 기
본권인 참정권이 침해당했는데 잠잠한 분위기에 대한 항거이며, 평등이 무너진 사회에 대한 분노랍니다.
이런 모습,,,청년의 모습이라서 좋은 일입니다.
종교와 교회는 어떤가요?
모 서울대 종교학교수는 현대인은 종교는 없지만 영성은 있답니다.
명상과 템플스테이, 순례길 열풍 등이 기성종교를 떠났지만 영적 갈망은 여전한 증거랍니다.
그러므로 기복과 형식에 머물렀던 ‘표층종교’ 에서 벗어나 참된 나를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는 ‘심층종교’가 더욱 중
요해지고 있는 시대랍니다.
과연 그럴까요?
심층종교가 아니라 복음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 의 선언이며 믿는 자에게 구원
을 주는 능력의 복음입니다.
최근의 설교를 분석한 실태 조사를 보니 “위로” 설교가 거의였고, “복음의 능력” 설교는 아주 미약했다니 유감입
니다.
결론) 세대를 초월해서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다워야 합니다.
곧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이루며,,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사랑으로 하나되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소망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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