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사랑합니다.
페이지 정보
본문
사도바울은 말 많고 탈도 많은 고린도교회에 직접 편지를 쓴 후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내용이 있습니다.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원문적으론 “저주를 받으라”인데 원수가 아닐진대 이런 인사말이 있을까요?
1) 편지의 대상
편지를 쓰면 그 대상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역시 그 교회의 두 종류의 교인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잘 믿는 교우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인 만큼 그들에게 더 말할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은 교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였고 저주를 받은 상태이기에 그들에게는 강한 메시지가 필요했을 것입
니다.
빛과 그림자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에게는 복이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있음을 다시 증명하고 다시 깨우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이지만 불신자에게는 저주를,,
신자들에게는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하는”의미로 주님을 더 사랑할 것을 장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사랑은 일반적인 형제사랑이기에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교인들에게 높은 수준의 사랑을 주문하지 않았음
이 특별합니다.
이는 눈높이 지도이고 인사인 셈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린도교회 사랑은 어떨까요?
24절)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무엇이든 사랑하려면 그냥 사랑할 수 없습니다.
상대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있어야 진짜이고 또 경험치인 추억과 비밀이 있어야 깊어집니다.
고린도교회에 대한 사도바울의 사랑도 그렇고 우리가 주님께 대한 사랑도 그렇습니다.
부모자식,, 친구간의 추억과 비밀이 있는 반면 주님과의 추억과 비밀이 얼마나 있나요?
그런 일이 많아야 좋고 비로써 “주님,, 사랑해요” 가 고백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실감되는데 나 역시 어찌 고백하지 않을 수 있나요?
기도응답, 말씀의 깨달음, 기적체험 등,, 무엇이든 강렬한 경험일수록 오래남고 뼛속까지 스며들어 사랑유전자를 만들기에 좋
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사도바울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탁월했던 이유는 부활의 주님을 만남에 있습니다.
죽으신 주님이 다시 살아난 그 사건의 목격자요, 경험자가 되었으니 어찌 잠잠하며 어찌 증인이 안 될 수 있을까요?
사도바울도 다메섹 길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일을 자기를 붙잡은 천부장 앞에서도,,또 심문 받는 왕 앞에서도 간증했으니 얼
마나 그에게 큰 경험인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날 수는 없으나 반대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죽고 사는 믿음의 경험, 거듭남의 체험은 간직해
야 합니다.
이런 일은 여전히 생생해서 믿음에서 사랑으로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2) 주님,, 오십시오.
친분 있는 사람, 신뢰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런데 날 사랑하시는 주님이,,내가 사랑하는 그 주님이 다시 오신다니 어떨까요?
반갑게 환영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도 밧모섬에서 유배살이 하면서 주님오심을 계시 받고는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했습니다.
“마라나타” 예수님 당시의 일반적인 언어인 아람어로 “주님, 오십시오.” 입니다.
그런데 "마라나타" 는 띄어쓰기에 따라 내용이 3종류로 달라집니다.
미래형으로 “주님께서 오십니다.” 또는 “임하십니다.”
또 완성형으로 표현할 때는 “주께서 오셨습니다.” 즉 성육신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붙여 쓰는 기원문으로 쓸 때는 “주님, 오십시오.”가 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지금의 성경은 흠정역 성경에서 마라나타로 번역하였는데 대체로 심판과 연관될 때 주님의 재림을 나타내며
초대교회 때 많이 사용한 “주님, 오십시오.”가 타당한 번역이 됩니다.
주님의 오심은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맞이하냐 입니다.
여러분은 설을 어떻게 맞이했나요? 연휴 끝난 다음날 출근은 어떤가요?
남자들의 입영 날은 어땠고, 여성들의 시집 간 날은 어떤가요?
오늘의 예배는 어떤가요? 마음과 생각에 따라 다르듯이 주님 맞이도 그렇습니다.
설령 두렵다 해도 어떤 두려움인가요?
고추가 그냥 무섭게 맵기만 한 매움이 있고, 단맛이 도는 매운 맛이 있듯이,, 하나님경외는
무슬림들이 알라를 무섭게만 여기는 경외가 아니라 주님사랑이 곁들린 공경심이어야 합니다.
저주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무서울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낯설지 않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가늠해 봅시다.
3) 주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무엇인가요?
대중가요에서는 눈물의 씨앗이라고 했지만 그밖에 주는 것, 희생하는 것 등 많습니다.
그만큼 사랑은 팔색조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
또한 아직 죄인된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신 사랑은 언제나 최고요, 최선임을 의미합니다.
부모사랑도 그렇지 않나요?
그렇다면 장성할수록 최고와 최선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사랑의 성향인줄 믿습니다.
신6: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여호와를 사랑하라
나아가 주님사랑은 그 계명을 지키는 일이고,, 그 사람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이기에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의 이룸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 사랑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받을 때는 아주 달콤하지만 줄 때는 쓰디써서 주기 보단,, 받을 사랑을 계수하곤 하여 사기 사랑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지조 있게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그 신앙과 그 사랑을 이루었다면 우리는 에베소교회처럼 첫사랑을 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의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무거운 멍에가 아니라 자연스런 삶이고 일상이어야 합니다.
마치 충성과도 같습니다.
충성은 충성스런 사람의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지요?
결론) 우리는 주님을 믿는 일이 있고 아는 일이 있는데 결국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의 몸짓과 고백이 퇴보되지 않고 진보되어야 발전하는 것입니다.
굳은 몸이 훈련하고 숙달되면 동작이나 활동이 좋아지듯이 우리는 사랑에 힘써야 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