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부터 힘써 오던 일
페이지 정보
본문
사도베드로와 사도바울이 만났다 헤어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주 믿는 사람들인 만큼 헤어질 때는 “파이팅”하는 의미로 친교의 악수를 했고,
“훗날 또 만납시다”하는 말 대신,,“가난한 사람을 기억하시다” 했습니다,
이 둘은 성품도 고향도 심지어 신앙배경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믿고 증거 하는데 이견이 없었기에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고,, 가난한사람들을 생각하는 일 역시
같았기에 동상이몽이 아니라 이상동몽이었기에 귀감이 됩니다.
1) 친교의 악수
미처 친숙하지 못한 개성 강한 사도들이었지만,,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었기에 주를 믿고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가 된 비결은 주의 영광이 큰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베드로는 할례자인 유대인에게 전도하고, 사도바울은 로마시민권이 있어 이방인에게 가서 전도하기로 한 일,, 생
긴대로 되어진 일이지만 실제는 주 안에서 부르신 대로 순종하고 인정한 일입니다.
고후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이들에게는 고백만이 아닌 중심으로 주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영광이 나타나도록 자신과 사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모여서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고 더 커져서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도 주 대신 내가 나오면 사분오열이 됩니다.
다투는 곳에는 꼭 나름의 명분인 떡이 있기에 이 떡에 대한 손해 보지 않으려 다툼이 되고 마침내 싸우고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생할 줄 모르는 종교는 원칙 없는 정치 같아서 시끄럽고 감동을 주지 못해 아무런 변화를 이루지 못합니
다.
결국 세상의 민폐로 전락하게 됩니다.
최근 들어 세상은 무종교인이 증가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떡 싸움에 대한 싫증과 무관심이 종합된 것입니다.
그중 기독교는 거부를 지나 배척까지 받는 상황이 되었으니,,좋게 받아드리면 거룩성이 발달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폐쇄성이 짙어진 이유가 됩니다.
한 조사에서는 세상이 기독교를 거부하는 대표적 이유가 “기독교는 세상과 소통할 준비가 아직 안 돼 있다”고 했습니
다.
그렇다면 여기서 돌아서야 하는데 “뱀처럼 지혜롭고 뱀처럼 순결함”이 요청됩니다.
지혜와 순결은 세상에서 방식을 찾을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초대교회는 무식한 사람들의 공동체였고 가난하고 나약한 교회였지만 성령으로 순결했고 하늘위력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칭찬받고 사랑도 넘쳐 믿는 자가 날마다 더 했습니다.
우리는 친교의 악수를 교회끼리만 아니라 이웃끼리도 자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곧 주의 나라가 건강하게 임하고 확장되는 비결인 줄 믿습니다,
2) 기억하라
사도베드로가 돌아서면서 사도바울에게 부탁한 일이 바로 이런 일이였습니다.
건강유의도 아니고 마귀조심도 아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시오”입니다.
이들은 전도자였습니다.
전도만 해도 버거운 일인데 거기에 가난한 이웃까지 신경쓰라했으니 전도와 구제는 함께하는 형제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신앙의 대의가 여기에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잊고들 있어 부자되는 일과 많이 모이는 일만 좋게 여깁니다.
곧 정체성을 놓치지 않고 균형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직 예배만 아닌 기도회도 강조되어야 하고 전도와 함께 구제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 전도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아파트우편함에 전도지를 넣었더니 주민이 신고해서 경찰이 전화를 해왔답니다.
사람을 모으지 못해 인기인을 앞세웠는데 이제는 그조차 무관심해졌습니다.
어느덧 인구도 줄고 교회미래도 어두워졌고 따라서 헌금도 줄어 위축이 됩니다.
그래서 더 인간적이고 세상적으로 사람을 모으거나 붙잡으려고 수단과 방식을 동원하는데,,
그럼에도 잊지 말 것은 베드로가 부탁했던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시오” 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제일 많고 쉽게 만날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탁에 사도바울역시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했으니 성도의,, 교회의 잊지 말아야 할 본문이
기도 한 것입니다.
성도된 우리는 비록 땅에 살아도 하늘의 성향과 기질이 있기에 그처럼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성향이고 복음적 기질인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와 바울도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후 새롭게 변화를 받아 이룬,, 그리고 훈련된 삶이라 믿습니다.
보십시오,,
사도베드로와 사도바울은 달라도 너무 다른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같습니다.
무엇이 이처럼 다른 이들을 같게 했을까요?
자신들을 구원해준 복음이었고 믿게 하신 보혜사성령 덕분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는 줄 믿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다양한 청년들이 훈련소에서 수료할 때는 다 같은 군인으로 나옵니다.
훈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겉만 같을 뿐 속은 여전히 천차만별이기에 생활관에서는 갈등합니다.
성도는 이와는 다릅니다.
속부터,,마음과 생각이 목적과 목표가 예수화 되어 있습니다.
주님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도 했습니다.
하나님경외를 어떻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그 믿음의 표현은 하늘을 향하여 막힘이 없도록 주님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경건이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막힘이 없는 사랑입니다.
과거 나쁜 운동가들은 이념을 주입하려 가난한 이웃들에게 접근했었고 운동하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어야 합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전에는 그렇지 못했으나 지금은 사랑이라는 분명함이 있어야 맞습니다.
주님 믿고 나서는 취미나 특기도 변화되어서 나는 없고 주와 이웃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이웃에 대한 태도변화가 관건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복음의 전도, 의를 행함,, 또 선을 행함으로 가난하거나 약한 자들에 대한 마음과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으라는 전도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은 언제나 같습니다.
전도가 목표라면 구제는 방편이고 전도가 개인구원이라면 구제는 사회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려면 성령 받아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인이 되리라” 하심처럼,,
그 속에는 자기 사랑에서 나아가 이웃과 민족사랑, 더 나아가 인류 사랑까지 자라야 합니다.
약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
가 죽은 것이라
한 작은 상가교회가 월세프로젝트를 하면서 100만원씩 30교회를 선착순으로 도왔습니다.
그 교회도 비싼 월세를 내는 교회인데 이번에도 또 그랬습니다,
먼저 번에는 재정 보는 집사님이 불신의 친구에게 “우리교회는 어려운데도 약한 교회 돕는데 열심이다” 고 한 것을 그
불신친구가 듣고 큰돈을 헌금해주어 그때도 섬기고 나누었던 것인데 이번에 또 그런 것입니다.
진정한 부자는 개인이든, 회사든, 교회이든 소유가 아니라 나눔에서 진가가 나타납니다.
결론) 우리 신앙은 주님이라는 중심을 잃으면 이상해집니다.
믿는다면서 내용이 없고, 섬김을 받으려 하고 받기를 바라게 되고,, 크고, 많고, 높고 등의 외형적으로나 외식하는 신
앙이 됩니다.
성령은 떠나고 마침내 탐욕적이고 정욕적인 사람이 되어 맛 잃고 버린바 되는,,
우리는 무엇에 친교의 악수를 하면 무엇에 본래부터 힘써 행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 이전글소금과 빛 23.03.20
- 다음글마음으로부터 드리세요. 23.02.1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