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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의 철병거 > 설교말씀

골짜기의 철병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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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3-04-09 13:10 조회 232회 댓글 0건

본문

이스라엘민족이 출애굽부터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점령하기까지 어땠을까요? 

죽고 사는 큰일을 치르느냐 쉬지 못했던 민족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오직 주의 은혜와 능력만이 있었으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들의 역사는 어마어마한 대서사인 것

입니다.

 

1) 그들 속에는

그렇다면 그들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었을까요?

굳이 뇌 과학자의 분석을 논하지 않아도 떠나온 애굽에 대한 미련과, 광야살이 고생에 대한 애환과, 새로운 가나안 땅

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도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잘 아시고 그들에게 새 힘을 주셨습니다.

삿1:1~2)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

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이들의 질문에 지체하지 않으시고 즉시 답을 주시면서 유다족속을 앞세워서 선봉에 세우시며 함께 하신다 하셨으니 이

스라엘민족은 어땠을까요?

지금껏 그래왔듯이 이겨 논 승리가 아닐 수 없어 앞선 축제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젖과 흐르는 땅이었지만 그냥 취할 땅이 아니라 이방족속들이 이미 살고 있는 만큼 싸워서 차지해

야 큰일이 남아 있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민족이 이 시점에서 먼저 하나님께 여쭈었다니,,이게 중요합니다.

그들 속에 하나님이 계신 증거로써 지난 40년간의 출애굽여정이 헛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그리고 믿음,,그래서 행동과 행위가 삶을 증명하는 것, 하나님 경험에서나온 지식인 줄 믿습니다.

 

사람 모두는 똑 같습니다.

생김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그렇습니다.

중년의 남녀가 사이좋게 식당이나 공원을 산책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과거에는 불륜으로 생각했다면 이제는 재혼으로 생각한다니,,

변화하고 있는 생각이라지만 어떤가요? 일종의 편견이었습니다.

그러나 금실 좋은 부부도 많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이라서 하나님을 알까요? 구원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먼저 찾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랬다니,, 이게 곧 영생이고 신앙교육과 선교의 필요성입니다.

성령은 이 일을 이루도록 하시지만 마귀는 못하게 훼방합니다.

세계 좌파정권에서의 특징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듯 마음과 생각 속에,, 많은 것들이 들어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담고 살아야 합니다.

자녀교육에서도 10대에 이 지식을 심어주어야 평생 간직하게 됩니다.

결국 어느 때에든 하나님을 찾게 되고 만나게 되고 화목하게 될 줄 믿습니다.

 

2) 유다

유다는 야곱의 맏이도 아니고 유다지파는 대표적 지파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목하심으로 선봉에 섰고 그 하나님의 보장으로 힘을 얻어 승승했습니다.

삿1:18) 유다가 또 가사 및 그 지역과 아스글론 및 그 지역을 점령하였고

왜 하필 유다지파가 선봉이어야 하는가?

이 가문에서 훗날 다윗 왕이 나왔고 더 훗날 그리스도가 나왔기 때문일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왔습니다.

삿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이 함께 계셨는데도 철 병거에 눌려 쫓아내지 못했다니,,그들에게는 철 병거가 하나님 보다 더 컸던 것입니다.

이 탓에 유다는 반쪽 성공을 이루었고, 반쪽 제자가 되었으며 반쪽 믿음이 된 것이었습니다.

 

두 가지를 크게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으므로,,”이 함께하심이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현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신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골짜기 주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골짜기의 철병거가 오죽했을까요?

또 얼마나 있었을까요? 이미 산지 주민들을 쫓아낸 마당에,,그럼에도 놀라 포기했었으니,,

이런 모습은 용사의 모습이 아니라 포기하는 탈영병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에는 없을까요? 우리 주변에는 없을까요? 내게는 없을까요?

 

하나님 에스겔 선지자에게 “인자야 마른 뼈들이 살아나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때 선지자는 뭐라고 했나요? “주께서 아십니다.”

상식과 이성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간접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마른 뼈들을 살리셔서 이스라엘의군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듣고 보는 일에 치우쳐 믿음에 부정적일 때가 많습니다.

철 병거에 대한 편견으로 불안해서 낙심하여 포기하는 상태입니다.

이럴 때 믿음은 허약하고 잘해야 반쪽이 되지만 다시 믿음으로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철병거와는 맞서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는 철 병거 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철 병거는 고장 난 고물일수도 있고 우리에게 바칠 진상품일수도 있는 것인데,,

해보지도 않고 미리 놀라서 포기한 것은 큰 불신입니다.

 

3) 철 병거

철 병거는 무엇일까요?

과학이든, 철학이든, 경건이든, 경험이든, 죽음이든,, 세상과 사람이 정해 놓거나 아님 내가 정해 논 한계치입니다.

코끼리는 힘이 센 장사이기에 길들일 때 쇠줄로 다리를 묶어 놓는 답니다,

그 후 동아줄로 묶어 놓아도 도망가지 못한답니다.

벼룩도 마찬가지랍니다.

자기 몸의 수십 배를 뛰지만 컵에 눌리면 컵 이상을 뛰지 못하는 한계치에 길들인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이처럼 조종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를 위해서 하신 하나님말씀이 있습니다.

수1:6)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여기에 비하면 다윗은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그의 많은 전쟁에서의 승리는 병기나 전술이나 운이 아닌 하나님이었습니다.

시18: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한계를 뛰어넘기를 얼마나 자주했는지 모릅니다.

 

국민일보를 보니 모 목사님이 당신의 교회 권사님을 “보석과 같은 신앙”으로 소개했습니다.

22살에 결혼해서 6,25때 남편을 전장에서 잃은 후 예수님을 믿는,,지금은 100세랍니다.

그 권사님은 70세에 뇌종양이 왔었는데,, 권사님은 “내 문제는 하나님의 처분을 따를 뿐” 이라며 수술을 거부한 체 지

금까지 산답니다.

믿음은 암을 이길 수 없다는 현장을 보아온 목사님은 감동 그 자체였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철 병거는 무엇일까요?

마음과 잠재 속에 있는 사망입니다.

오죽하면 마지막 원수일까요?

그러나 성도에게는 분명한 약속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 사망을 주님이 이미 이기셨고 성도가 넘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결론) 그러므로 성도는 철 병거된 두려운 사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부활이 무엇인가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입니다.

주님이 앞서 이루셨기에 내게도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 없기를 축복합니다.

함께하시는 주의 능력,,확인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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