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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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감동도 있지만 상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변화를 이루는 힘은 무엇일까요?
무력이 아닌 감동은 변화를 이루는 힘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껏 어떤 감동을 받았으며 어떤 감동을 끼쳤는지요?
그렇다면 감동은 어디서 나오는 힘일까요?
1) 관계
오늘 성경에서는 로마감옥에서 고생하는 사도바울이 있고, 사도바울이 아주 뜨겁게 사랑하는 빌립보교회가 있고, 교회
에서 사도바울에게 보내준 에바브로디도가 있었습니다.
시대와 지역은 달랐지만 이들도 우리처럼 성정이 있고 죄와 죽음과 먹고사는 일에 고전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다른 모습이 있었습니다.
서로를 위하는 모습인데 아주 감동적인 사랑입니다.
이처럼 서로를 위하는 모습은 성숙한 모습이고, 섬김의 모습이고,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먼저는 이들이 주 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믿음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었기에,,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을 보며,, 같은 성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인데 생명이 같아서입니다.
이 모습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못하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부모형제도 원수가 되는 이유는 온유와 겸손은 없고 정욕과 교만이 높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런 생명에서 거듭난 사람들이기에 노는 물이 다르고 노는 스타일도 달라야 합니다.
한 원로장로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러 얘기 중에 최근 며느리가 권사취임식을 앞두고 사전 사진촬영을 하던 중 한복에 하이힐을 신고 넘어지는 바람
에 다친 고관절이 다시 다쳐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며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연락이 오기를 취임식에 참석 못했으니 다른 분들과 함께 권사취소라고 했답니다. 장로님은 이 일이 너
무하다 싶었고 아들네는 동네교회로 옮긴다고 했답니다.
목회자로서 이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법은 있지만 사랑은 결여된 처사였습니다.
심방으로 서약서를 받았으면 될 일인데 융통성 없게 일을 풀었으니 사랑 부족인 것이고 교우들은 상처를 입은 것입니
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으면 세상에서 많은 상처 보다 더 아프고 오래 가는 이유는 바로 이런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성령의 법칙을 만드셨고,, 새 목적과 새 목표를 주셨습니다.
요13:34~35)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2) 사랑은 디테일하게,
사랑은 성령 받은 성도에게만 있는 거룩한 친절이며 보람이고,,
주와 동행하는 멋과 맛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두 모습이 있습니다.
엄마가 되어 잉태하고, 낳고, 키우는 찐 사랑이 있고,,
엄마노릇 하는 유모의 사랑이 있습니다.
작은 차이 같아도 큰 차이입니다.
엄마는 희생을 감수하는데 찐 사랑의 힘입니다.
요즘 그 찐 사랑을 보고 있기에 숭고함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유모는 직업이기에 관심이 다른데 있습니다.
아마추어인 엄마의 사랑을 프로인 유모의 능숙이 능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의 형태를 보십시오.
첫째는 파송한 빌립보교회 사랑입니다.
바울선교사가 감옥에 있기에 살펴주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어 곁에서 옥바라지를 하도록 한 것입니다.
즉 함께하는 사랑이고, 이게 믿음이고, 진정한 거룩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우는 아기에게 젖을 더 주는 세상입니다.
제비나 까치가 둥지의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는데 방금 먹이 먹은 새끼를 어떻게 구별하나 궁금했었는데 책에서 보니
간단했습니다.
입 크게 벌리는 새끼였습니다.
여하한 탐욕스런 놈이 더 먹는 구조였기에 동물은 양육강식의 세상이 됩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렇지 않는 정반대의 세상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살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파송된 사도바울의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은 입 크게 벌렸고,, 더 울었나요? 성숙한 신앙이었기에 반대적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을 봅시다.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존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
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
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거을 할 수 있느니라
어떤가요? 듬직한가요? 신뢰가 가나요? 교회를 향한 사랑입니다.
성도는 너무 죽는 소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기 때문인데,,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신분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는 에바브로디도의 사랑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바울은 위하여 죽기에 이르도록 사랑했습니다.
빌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도록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
족함을 채우려 함이라
에바브로디도에게 이 일은 교회가 맡긴 일인 만큼 개인이 개인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었고 교회가 주님을 사랑한 일이
었기에,,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한 것이라 했습니다.
빌2:25~26) ~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정히 사모하고 자가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사랑에는 콩깍지가 씌우듯이 주님을 사랑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인이신 은사목사님은 황해도에서 피난오신 분이십니다.
헌신예배에서 설교하시면 유독 눈물을 보이시곤 하셨습니다.
이북에서의 전도사시절 인민군을 피해 산굴에 숨었었는데 여 집사님이 음식을 날라주다가 붙잡혔지만 실토하지 않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또 부산피난시절 신혼이었는데 주일 아침이면 사과 몇 알, 생선 한 마리가 계속 사택마당에 떨어져있었기에 살펴보니
목사님이 돌아가신 사모님들이 연합해서 설교하시는 젊은 목사님이 힘이 있어야 된다며 살펴주신 거랍니다.
그런데 은사목사님은 현대는 목사더러 죽으라 할 것이고,, 목사 입에 있는 것을 빼서먹는다고 씁쓸해 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늘로부터 온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고생하자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파송해서 곁에서 물심양면으로 돕도록 한 일과 그 돕는
일에 에바브로디도가 병 들었고 그 소식에 교회가 놀라 근심하고,, 그 근심에 또 에바브로디도와 사도바울도 근심하여
에바브로디도를 교회로 다시 보내는 사랑입니다
빌2:28) 그러므로 내가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함이니라
결론)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찾은 바가 되고 붙들린 바가 된 사람들입니다.
사랑할 때 승리하고, 거룩하고 하나님 사랑도 알게 됩니다.
빌2: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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