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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보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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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3-07-02 13:23 조회 19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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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자칭 의롭다고 하는 욥에게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을 요약하면,,

딱 두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아느냐?” “너는 할 수 있느냐?”

여기에 욥은 눈꺼풀이 벗겨지면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죄인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1) 고난의 유익

지난 주일설교에 잠시 소개했었지만 한 지방 목회자세미나의 주제가 “어떤 목사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인가?” 는 개인

적으로는 충격이었습니다.

현재 목회자들 속에 있는 생존의 두려움을 보았고, 또 성경적이지 않는 방법을 찾는 듯해서 불편했고, 강사는 이럴수록

 더 프로다운 목사이길 주문했는데,, 여기에 목회이중직에 대한 어려운 형편의 목회자들이 불평했다는 말에 또 놀랐습

니다.

 

실제 내가 강사가 되었다 해도 “더 프로 다운 목사가 되세요.” 하거나 아님 “죽어야 삽니다.” 할 것인데 이는 성경적경

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받아드리는 입장에서는 살고 싶은데 죽으라니,, 지금도 프로라고 생각하는데 더 프로가 되야 한다니,,서운할 것

입니다.

 

가장 좋은 일은 무엇일까요?

힘든 사람에게 “많이 힘드시지요?” “이것 좀 갖다 사용하세요.” “좀 쉬세요.” 하는 일이고, 힘든 본인들에게는 누가 아

닌 스스로 마음에 변화를 받아 “ 찬송가 450장, 예수영광 버리사 사람 되신 것 보고 너도 고난당하나 길이 참으라 ” 이

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니 서운하고 야속한 게 되었습니다.

자칫 고난으로 고생만 하고 변화를 이루지 못하면 고난만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라지만 이 고난을 잘 겪으면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어 매력적인 신앙과 인품으로

 거듭납니다.

그 잘났다는 자아가, 그 똑똑하다는 자기애가 뽑히고 다듬어져 자기 안의 무늬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난다 긴다 하던 인물들이 하나님께 붙잡히고 쓰임 받는 일에 고난은 필연적 과정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모세를 꼽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애굽의 모든 학문과 학술을 배운 엘리트였지만 미디안광야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에는 지면의 모든 사람 보

다 온유함이 승한 사람이었고 비로써 쓰임 받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학문적으로나, 가문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그는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역시 주를 만난 이후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는데,,주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지식으로 여겨졌기 때문입

니다.

이들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고난이었습니다.

누구든, 특별히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서 사람을 만나시고 부르시고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다니엘과 친구들의 고난이라는 풀무불 속에 던져졌을 때 구약의 주님께서 불꽃 속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음은

 우리에게 담대함과 기대감을 주는 일입니다.

단3: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이 아들과 같도다 하고

 

2) 사람들은,

사람들은 물론 성도들은 고난에서 기지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묻는다.” 는 베트남시인 휴틴의 시가 대변해 줍니다.

 

땅에게 묻는다. 땅은 땅과 서로 어떻게 사는가 우린 서로 존경한다.

물에게 묻는다. 물은 물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채워 준다.

풀에게 묻는다. 풀은 풀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짜이고 얽혀 지평선을 만든다.

사람에게 묻는다.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사는가 스스로 한번 대답해 보라

 

세상은 아직 쓸만한데 왜 사람들은 못 살까요?

지난달 10일에는 마포대교남단에서만 30분 간격으로 2명의 자살자가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힘들어서 아님 외로워서,, 왜 힘들고 외로울까요? 사람이 없어서요?

왜 사람이 없을까요? 사람이 무서운 존재요, 기피 존재가 되었기 때문인데,, 반련견 1500마리 시대가 반증하고 있습니

다.

 

하나님형상과 모양을 닮은 사람에게서 사랑이 빠지니 나도 남도 괴물이 되어 있습니다.

그거 아시나요? 뼈와 뼈 사이는 관절이고 연골이 채워줍니다.

연골은 부드러워 뼈가 잘 연동되게 하고 완충작용도 해 줍니다.

사람마다,, 사람 간에,,사랑이라는 연골이 없어져서 그저 고통만 호소할 뿐입니다.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셨는데 벌써 현실화 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어디서 찾을까요? 얻을까요?

인류와 세상에게 있어서 사랑의 물댄 동산 같고 샘이 마르지 우물은 어디일까요?

요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 하셨는데,,

단순히 짠 맛과 밝음만이 아닌 생명과 삶의 모든 요소인 사랑과 의와 진실과 거룩이 다 포함된 소금이고 빛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다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욥38:25)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의 길을 내어 주었느냐

세상 사람의 마음 마다 사랑의 길이 있는데 아느냐? 하시며,

그 사랑을 하겠느냐 하십니다.

욥38:31)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삶의 피곤함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며 노래로나 시로 어떻게 다 나타낼까요?

부분적이긴 해도 전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믿음, 구원, 기도, 다 어떻게 이루어 갈 수 있나요?

우리 의가 아닌 오직 주의 은혜로만 완전한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완전한 은혜가 사랑 아닌가요?

사랑받음이 믿음이고, 죄와 허물을 용서함이 구원이고, 나눔이 전도이고 선교인 줄 믿습니다.

 

3) 큰사랑에서,,

중국의 동역자 목사님은 북한에 가서 쌀도 주고,, 석탄도 주고, 신정과 구정 때에는 돼지도 잡아 줍니다.

신정 때 설사를 해도 아이들에게 고기를 먹여놓으면 구정 때는 얼굴이 다르고 설사도 안 한답니다.

이 분이 언제나 나누어주면서 하는 말이 있답니다.

“나도 큰사랑 받아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제는 감시하는 보위부들이 ”빨리할 것 하시라”면서 자리를

 비켜주면 잠깐 기도한다고 합니다.

 

사랑은 클수록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을 살리는 큰 사랑이 세상에는 없고 사람들에게도 없습니다.

큰 사랑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사랑에 연합할 때 비로서 작은 사랑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주변에 보면 “나도 주님 사랑 받았기에 작지만 나누는 것입니다.”

혹은 “내가 아무개 박사에게서 은혜를 받았기에 기꺼이 도움을 드릴 뿐입니다.” 합니다.

세상이 살벌한 것은 이 사랑이 없어서 그렇고,, 이 사랑이 선순환 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용사라면 사랑에도 용사여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불신자가 사랑을 실천하는데 성도가 사랑이 없다면 누가 더 온전한가요?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

원하겠느냐

약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불신자의 사랑은 자기 의를 위하는 일이고 성도의 사랑은 주님 사랑이기에 작아도 큽니다.

 

결론) 사랑은 연필로 쓰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심장의 피로 찍어서 써야 맞습니다.

주님이 그러셨고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사랑은 중요한 신앙고백이고 찬양이며 성숙이고 선교가 되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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