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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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을 즐거워하는지 또 무엇을 얼마나 찾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며 말하나요? 아니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1) 다윗의 고백
다윗도 남들처럼 일반적인 것을 일반적으로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19: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위의 고백을 보면 지금은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지만 과거에는 모든 재물을 즐거워했었다는 고백입니다.
이상한가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너나할 것 없이 아이는 아이답게,, 어른은 어른답게 좋아하는 것들이 있고,, 여성은 여성답게,, 남성은 남성답게 좋아하
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적일 때는 육적인 것이 있고 변화되어 주의 사람이 되었다면 주의 것이 됩니다.
마치 개와 고양이가 비슷해도 본성대로 생선과 고기를 각기 좋아하듯 사람도 그렇습니다.
다윗도 그랬던 것인데,, 그러나 여기서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시119: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 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재물을 즐거워함에서 주의 계명들을 더 사랑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를 성숙이라고 하고 변화라고 하고 또는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지식과 가치가 변화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발전했습니다.
시119:136)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이는 아주 큰 성숙의 모습으로,,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탓에 하나님과 그 말씀을 무시했을 때 다윗이 가졌던
아픔이고 슬픔이었습니다.
성도는 누가 교회를 핍박하거나 주님을 욕하면 의분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로써 건강한 발전이고 발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을까요?
시119:49~50)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이처럼 주의 말씀을 경험했기에 의요 진리로써 인정되고 고백됩니다.
시119:142)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이런 일은 더 있을까요? 실질적으로 더 일어나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며 작은 예수로 사는 것입
니다.
종교는 고등종교라 해도 개선은 될지언정 거듭남을 이루지 못해 새롭게 되지 못합니다.
죄 문제,, 곧 죄를 해결 못해 하나님과 화친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은 영혼부터 새로워져서 거듭남을 이루고 뼛속부터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보십시오.
시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어떤 원통이나 후회가 없는 평안이 있었는데 곧 천국의 힘인 줄 믿습니다.
이 모습과 고백이 성도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2) 성도의 사랑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린 아이들은 장난감, 30~40대 남성들은 자동차, 중년에는 재물, 노년에는 건강 등에 관심이 있
습니다.
특별히 독립이니 통일이니 하여 독립운동가처럼 이상이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인가요?
다윗은 주의 말씀, 법도, 규례, 계명, 율례, 증거들에 대한 고백을 많이 했는데,, 이는 주님에 대한 시적 고백이지만 정
말 중요한 것은 이 주님을 즐거워했고,,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고백을 행동으로 하나님께 증명시키고 있잖습니까?
시119:167~168)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내가 주의 법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얼마나 확실한지요?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주의 법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성도들의 잘못된 사랑이 무엇인 줄 아시나요?
대체로 행동하지 않고 입으로 말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사랑인 냥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어느 날 주님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나요?”
주님의 대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나를 믿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니라”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이 은퇴소감을 책으로 내면서 인터뷰한 것을 보았습니다.
내용을 보니 자신의 “ 뼈와 살을 갈아 넣어 키운 교회” 인데 “남 주느냐?” 는 마귀의 소리가 들려서 후임자를 빨리 결정
했다고 했습니다.
교회를 키운 일도,,은퇴함도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인터뷰 댓글에는 “ 뼈와 살을 갈아 넣은 대형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 ” 하는 글로 주류를 이루었습니
다.
내가 좋아하는 일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다릅니다.
그 판이함이 주의 말씀에, 증거에, 계명에, 법도에 수도 없이 계시되어 있고, 주님이 이 땅위에서 보여주셨고, 사도들이
계승했으며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재현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잘못된 대표적인 일들이 있습니다.
과거 기독교란 이름으로 침략과 약탈이 있었고 종교재판이란 이름으로 마녀사냥이 있었다면,
현대는 열심히 선교라는 이름으로의 개종을 강요하고, 부흥이란 이름으로 복음이 아닌 자기교단 자기교회만 위하는 일
이고, 믿음이란 이름으로 사회적으로도 지탄 받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이루는 일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앙적 행동을 하는데 꼭 참고하실 점이 있습니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우리 믿음은 비이성적인 내용을 믿는 일이지만 이성을 초월하지 이성을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자식이 엄마에게 따귀 때리는 것이 믿음인가요?
또 전염병이 도지면 조심해야지,,코로나 때 예배인원을 정부가 통제했다고 해서 박해로 이해하면 될까요?
민족해방을 위해 비폭력으로 맞서서 해방을 이룬 간디와 정권타도를 외치며 거리예배와 투쟁을 일삼는 목사님과 누가
주께 합당할까요?
에스더서는 하나님이란 단어는 없으나 메시지가 하나님을 말하기에 성경입니다.
반면 에녹서는 성경에 없는데 하나님을 말해도 메시지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3) 성도의 고백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의 고백은 다윗의 고백과 동일해야 좋습니다.
시119:173~174) 내가 주의 법도를 택하였사오니 주의 오른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미국 프로 풋볼리그는 최고 인기를 누리는 국민스포츠입니다.
올해 1월 첫 번째 월요일에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페이코 스타디움에서 열렸을 때의 일입니다.
치열한 경기 중 선수끼리 충돌로 한 선수가 쓰러졌습니다.
곧 의료진이 달려 나왔고 심정지상태의 선수를 살리고자 했으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선수들과 코치들은
선수를 둘러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고 생방송진행자들도 방송을 멈추고 기도했었고 기도를 독려했던 것입니다.
이 행동이 쉽지 않은 것은 믿지 않고는 어려운 행동이며,,평소 훈련되지 않고는 안 될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유감되게 우리는 아직 공개적인데서 그렇지 못합니다.
남을 의식하고 자기 체면이 크고 또한 훈련되지 못해서 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이렇듯 깃발처럼 펄럭이어야 합니다.
믿는 만큼,,주님을 향해 펄럭임이 결국 세상에서는 나비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말씀 중심” “기도 중심” 이라고 외쳤다면 실제로 해야 신앙이 됩니다.
말씀에 대해서는 성경을 조금 씩이라도 읽도록 해야 합니다.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감동 올 때 순종하는 훈련이 절대적입니다.
무엇이든 그렇지만 성도의 신앙 성장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이정도 수준인 것은 이 정도만 원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더 알기를 원하고 기도에 응답도 경험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이유는 성경과 기도에 그 정도만 시간과 마음을
가져서입니다.
결론) 세상은 이성주의로 충만하다면 믿음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에 신비가 없으면 안 됩니다.
신비주의가 아니라 말씀의 감동과 감화의 능력과 기도의 응답이라는 증거를 지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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