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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군천사의 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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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3-12-17 14:25 조회 16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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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서기 2023년이고 오늘은 12월17일입니다.

언제나, 현재와 오늘은 역사적인 시간이고 날입니다.

지나가면 역사가 되기 때문인데 그 역사는 참 빠르게 달려옵니다.

라틴어에는 미래를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1) 미래

첫째는 현재의 시간 뒤에 있는 미래, 즉 다음시간으로써의 미래, 우리가 만들어가는 미래로써 우리가 애쓰고 어떻게 선

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결과가 달라지는 미래입니다.

라틴어로 ‘푸트룸’인데 영어 ‘퓨처’의 어원이 됩니다.

 

둘째는 성도만이 갖는 미래입니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미래인데 다가오는 미래요, 약속된 미래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시고 만드신

미래입니다.

이 미래는 ‘에드벤투스’ 라 하여 대림절의 ‘에드벤트’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주님 기다림의 4주간을 대망절, 대림절이라고 카톨릭과 감독교회들은 부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교회는 그런 절기를 마다합니다.

크게, 간절히 준비하는 기다림의 진정한 의미는 캐럴을 부르고 트리를 만드는 일도 있지만,, 주님오신 목적을 잘 지키

고, 새기고, 증거하는 삶에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천사들이 노래하기를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하는데 틀렸습니다.

하늘에 무슨 영광을 가리키나요?

있다면 새벽의 여명이요, 중천의 빛나는 태양이요, 석양의 빛입니다.

땅의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평화일까요? 이웃 간의 평화인가요? 자기의 평화인가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주어를 빠트려서 모호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다시 보십시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입니다.

 

영광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시다” 이고,

평화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 이니 얼마나 다른가요?

 

여기에 선택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만의 역할이 있습니다.

수많은 천군들과 천사들의 찬송에 화답함입니다.

어떻게 화답할까요? 무엇으로 화답할까요? 물론 잘 화답해야함은 틀림없습니다.

곧 성탄에 대한 대망이 성탄에만 끝나지 않고 나아가서 주님 재림으로 이어져야 옳기 때문입니다.

 

2) 화답

* 교회가 교회됨으로 거룩함의 충만일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교회는 땅에 있어도 하늘에 속한 기관입니다.

천국의 지사이라서 그렇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고, 만물을 통일되게 하려고 친히 주님이 세우신 주님이 머리이신 몸된 신령한 기관입니다.

이 교회의 위엄은 어디에 있나요? 건축물이나 교인의 숫자나 재정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하시는 위력이고 죄와 구별된

거룩입니다.

첫째는 말씀의 능력이 있었고, 둘째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행8:6~8)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특별히 이 기쁨은 꾸밈이 아닌 샘솟는 기쁨이기에 세상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 경배와 찬송적인 삶이 평화를 이룹니다.

경배를 자주 하고 찬송을 많이 하는 일도 중요합니다만 삶이 참 중요합니다.

국민일보기사를 보았습니다.

요즘 김포 남양주 등의 신도시의 맘 카페가 발칵 뒤집힌 일이 생겼답니다.

코로나가 지나니 열심히 전도하는 일이 과열이 되어 놀이터의 아이들에게 또는 행인들에게 눈살이 찌푸리는 노방전도

는 물론 가가호호 방문하는 축호전도가 문제가 되었답니다.

할머니들이 아이들을 붙잡고 너무 적극적으로 “무엇하냐” “어디에 사냐” 아이들에게 집요하게 물어 보고, 초인종 눌러

책자를 나누어 주고, 성당에 다닌다고 해도 “자기네 교회 오라” 하고,,대체로 부정적인데 심지어 아이들을 데리고 교

회로 가려는 일들이 있어 미성년자 약취유인으로 경찰에 신고하라는 글도 있었습니다.

 

개인주의 시대가 되고, 믿지 못하는 시대로 달라진 만큼 전도도 노방전도나 축호전도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관계중심전도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편지요, 향기라고 한 만큼 얼굴과 언어와 행실이 좋아야 합니다.

맛난 것 좋은 것,, 이웃과 잘 나누는 일, 멋진 경배이고 전도가 되는 일입니다.

사업장도 그렇습니다.

돈을 버는 사업장이지만 돈만 생각하는 사업주가 있고 사람을 생각하는 사업주도 있는데,, 결국 주님의 지체된 성도의

인격이고 삶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갖고도 그렇지 못하게 전하는 아쉬움입니다.

정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면 표정부터 숨길 수 없고 모습도 달라야 합니다.

아니 경배도 그렇습니다.

살아계신 만유의 주께 참으로 경배한다면,,어떨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 되레 가리 우는 일이 많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친족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물론 완전 할 수는 없지만 연기자가 아닌 만큼 사실과 진실은 인정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기자에게 선배나 누군가가 “너 그러고도 기자야?” 한다면 어떨까요?

비슷하게는 “당신이 그러고도 의사냐?” “선생님이냐” 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주 믿는 성도인 우리에게 “당신이 그러고도 그리스도인이야” 한다면,,어때야 할까요?

 

3) 무게감

성도 또는 그리스도인의 이름에는 무게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5장을 보면 당시의 성도들에게 사도바울이 선생으로써 깨우쳐 주는 말이 등장합니다.

“12절)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초보에 대하여 누구

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선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래되었지만 미숙한 선생이니 다시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못난 사람들은 남 탓을 잘합니다.

그 말은 나 못난 것도 다 주변 탓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과 완전한 선생님은 주님이시기에 잘못 가르치실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나에게 “당신이 그러고도 그리스도인이냐” 힐문한다면 내 탓인 것입니다.

좋은 복음을 망치고 있지는 않나요? 천국을 지옥으로 보이고 있지는 않나요?

“당신을 보니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가 아닌 “믿고 싶지 않다” 가 돼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이 재계총수들과 부산을 찾아 한 시장에서 어묵을 먹는 일이 뉴스에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삼성회장이 “국물 좀 더 주세요” 한 후 받아서 “으,,맛있네” 한 말이 온 세상을 휘젓어 놨고 그 집은 그 영상

을 돈 안 들인 홍보로 띄웠습니다.

이 집은 솜씨가 좋았기에 소문을 잘 얻었기에 이들이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이고, 또 머리도 좋아 미래적인 기회도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가지 씌웠다는,,그래서 악평을 얻고 영업정지까지 먹은 상인에 비하면 얼마나 좋은가요?

 

결론) 삶은 동서고금이 동일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기록된 성경이 현대에서도 팔리고 계시의 말씀은 빛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화답에는 박수도 있고, “얼 쑤” 하는 추임도 있고, “짠”하고 잔을 부딪히는 일도 있습니다.

주님 오신 성탄에 대한 성도의 화답은 현재의 삶이 내일의 미래인 퓨처만이 아닌, 주님 약속하신 미래의 ‘에드벤투스’로

이어져야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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