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제일교회
홈로그인

오른쪽 마음 > 설교말씀

오른쪽 마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3-01-22 08:58 조회 242회 댓글 0건

본문

마음에도 번지수가 있다면 믿겠습니까?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 쪽에 있다했으니 우매자는 자연 그 반대인 왼 쪽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떨까요?

시16:3)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 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뿐만 아니라 “오른 팔로 나를 붙드시고” 해서 하나님은 우파라는 농담이 나오기도 했지만,

실제 오른 팔은 더 강한 팔을 상징하고, 오른 쪽 마음은 옳은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1) 오른 쪽 삶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성경적 삶을 사는 곧 지혜자의 삶이기에 주님과 같고 사도바울과도 같은 주 동행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은 믿음이 작고 신앙적의지도 약해서 그렇습니다.

 

지금은 신앙적 박해가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의 눈총은 그 어느 때 보다 커서 우리사회에서 기독교 선호도가 16%랍니다.

기독교 인구는 17% 이니 성도들을 빼고는 그만 다 부정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라는 절대명품을 갖고도 나라고 하는 브랜드가 홍보를 잘 못해서 그렇습니다.

세상은 아닌 것도 그렇다며 과장된 홍보도 하는데,, 성도들은 좋은 것을 그렇지 않게 보이는 특별한 은사가 있는 가 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일,,엄청난 신분상승입니다.

죄 사함 받고 영생 받는 일,.평생 위엄과 감사와 기쁨으로 살 일입니다.

이 엄청난 횡재가 고시를 치르거나 돈으로 사거나 출신성분이 좋아야 되는 것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선물인 은혜로 되고 믿음으로 영접하면 개인화가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죽을 쑤고 있어 외면을 당하니 답답합니다.

 

이유가 궁금한가요?

전10:1) 죽은 파리들이 향기를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니라

 

“죽은 파리들이 향기를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곧 행동하지 않은 신앙이며 죽은 신앙입니다.

길을 갈 때에도 지혜자는 지혜를,, 우매자는 미련하고 어리석음을 나타내거늘 삶에서는 오죽할까요?

 

2) 성령 충만

우리의 능력과 지혜와 성결은 성령 충만에서 옵니다.

어느 덧 삶이 여유가 있으니 온통 먹고 노는 쪽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증명은 소득이 3만 불 넘으면 어느 종교든 쇠퇴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더 가난해졌으니 돈벌이 하는 쪽으로 갔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이 줄었으니 여기에 우리의 실패가 있습니다.

 

성령을 잃으면 인본주의 종교가 되고 개인우선 주의가 됩니다.

개인의 편리,,영광이 앞서서 “나는 흥하여 하겠고 주는 쇠하여야 하리라”가 됩니다.

자연 공동체의 평화가 없어지고 사랑도 없어 전통주의나 실용주의가 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붙잡아야 할 칭찬 받는 믿음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 포용의 모습인데 예수님부터 순수유대인 순혈이 아니었습니다.

조상 중 보아스가 이방여인 룻과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다문화가정을 이룬 것인데 당시 그 씨족사회에서 그 결혼을 받아드렸습니다.

이방 여인 룻의 마음속에 있던 하나님 경외함을 인정한 덕인 줄 믿습니다.

 

초기 기독교회가 이방인들을 받아드렸습니다.

앞서 12사도들이 사도바울을 사도로서 인정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순종했던 일입니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싸웠던 광복군이 파가 갈리고,, 독립운동인사들도 파가 갈렸던 일에 비하면 확실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전통 유대교와는 다르게 이방사람들과 미천하다는 사람들과 교류하시고 함께하셨는데,,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입니

다.

사람은 지식이나 경험치가 많으면 고집과 편견이 강합니다.

따라서 상대를 이해하거나 다름을 수용하거나 포용하는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를 깨는 것이 겸손이고 온유입니다.

 

우리는 같은 주를 믿는다 하면서도 갈라지고 상대를 무시하곤 하는데 정욕 탓입니다.

철저히 회개하지 못하고, 주변을 너무 인식하는 국민성과 복음적 삶을 살지 못한 이유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할수록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게 되어 주의 친절로 대하게 되며 복음은 복음답게

증거하며,,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타협 없이 섬기게 되는 줄 믿습니다,

 

*또 다른 모습은 충성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종으로써 죽는 데에도 충성하셨으니 다른 일에는 어땠을까요?

하나님은 그런 주님을 지극히 높이셨는데 상대적인 것입니다.

요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주님이 지극히 높아지셨음은 먼저 지극히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최고의 충성이셨고 아버지를 향한 최고의 신뢰였습니다.

이 신뢰 속에는 “먼저 대접하라”는 순종도 담겨 있고 “무엇이든 뿌린 대로 거둔다는” 믿음도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죽음에는 화들짝 놀라 도망가고,,고난과 궁핍 앞에서는 눈치 보면서 슬슬 피합니다.

주께로 도망가면 주께로 피한다고 하겠는데 세상으로 도망가니 되레 비참하게 될 뿐입니다.

성도는 똑똑한 사람이거나 손해 안 보는 사람이 아니라 집에서도 충성하고, 직장에서 충성해서 주님처럼 충성이라는 별명을 얻

어야 합니다.

결코 진부함이 아니라 신앙승리 인생성공의 주의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3)용기

* 마지막 모습은 용기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할수록 객기와 다른 담대한 거룩한 용기가 솟습니다.

누구도,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의와 복음에 합당한 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직접 부르심을 입고 배웠던 베드로에 비하면 사도바울은 사도로서 비주류였습니다.

그런 사도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갈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게바는 베드로의 다른 이름입니다.

뒷담이 아닌 대면하여 책망했다니 책망을 들었던 베로도 훌륭하고 사도바울도 휼륭합니다.

서로를 인정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일이 발전되어 초대교회는 자신들이 죄를 공개적으로 고하면서 기도하고 용서하는 일이

결국 부흥의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현대교회처럼 성령 충만 못한 체 죄를 자백했다가는 모두가 시험에 들고 교회는 문 닫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이 누명을 씌워 감옥살이를 하게 했습니다.

마침 왕 앞에서 변론할 기회가 왔을 때 오직 예수님만 증거 했습니다.

왕이 미쳤다고 하니 사도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것 말고는 왕도 자기처럼 되길 원한다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하늘지혜의 힘이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차에 시동을 걸고 운행하는데 브레이크에서 “스걱스걱” 소리가 났습니다.

브레이크는 잘 작동했는데,,마침 엔진오일을 교환하기에 점검을 했는데 이상은 없었습니다.

차를 세워두니 습기 때문에 소리가 난다했습니다,

 

결론) 누구든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말만 많고 세상과 사람을 따르느냐 피곤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데서 돌아서고 또 돌아서고 또 성령 안에 있는지 점검하고 정비해야 합니다.

사람은 포용하고, 충성은 더하고, 용기도 발휘해야 합니다.

잠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곳을 살피느니라

성령 충만해야 여호와의 등불이 밝습니다.

세상은 이런 비밀을 모르지만 우리는 계시를 받았기에 알고 있습니다.

죽은 파리같이 향기를 악취가 나게 하지 맙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