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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의 책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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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2-08-07 14:45 조회 26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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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성령님은 성도에게 힘과 능력과 인도자와 스승이 되십니다.

주님은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너희를 책망하시리라” 하셨는데 과연 그랬습니다.

“책망” 이란 적극적인 인도와 가르치심을 의미합니다.

옛 성도들은 이런 성령의 보호와 인도와 가르치심이 있었기에 거룩했고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주노니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며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1)발람

발람은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임하신 말씀을 잘 듣고,,백성들에게 잘 전달하는 사명자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속하여서 백성들을 깨우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매수되어 거짓예언을 하려했으니 백성은 물론 하나님께도 배반자가 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서 거짓예언을 하러 가는 그의 가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사자를 볼 수 없었고 말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죄로 성령이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사무엘선지자가 어렸을 때 하나님음성을 들었는데 반해 늙은 선지자 엘리는 못들었습니다.

늙어서가 아니라 죄로 어두워졌던 것입니다.

 

발람은 타고 가는 나귀가 이상해서 때리고 때렸더니 마침내 나귀가 입을 항의를 했습니다.

민22:30)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

 

나귀는 칼을 빼고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던 것이고, 그 나귀가 입을 열어 항의하며 발람을 책망하도록 하나님께서 입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귀도 보는 여호와의 사자를 선지자가 못보고, 또 사람도 아닌 나귀에게 책망을 들었으니 얼마나 망신인가요?

 

성도가 성령과 동행하지 않으면 이런 망신과 무력함에 잡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성도를 방치하시지 않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여호와 사자가 나타나고,, 나귀가 선지자를 책망하는 일은 발람을 회개시키는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이었습니다.

민22:34)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발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

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 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이런 일은 없을 듯해도 실제는 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적도 있고, 책망도 있고, 회개도 있고, 눈물도 있고, 감사도 있는 것입니다.

 

늦게 목사가 되어 개척교회를 했는데 빚만 지고 어려우니 목회는 접고, 트레일러기사로 살던 목사님이 계십니다.

조금 형편이 나아지니 “목사님들 밥 사 드려서 좋다”고 했던 분입니다.

교회 개척하는 목사를 보면 부러워하고,, 주일오후에는 출근하기에 주일예배에 분주했던 그였는데,, 차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

습니다.

수술 후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이 일로 내 삶의 터닝포인트로 삼아야하는데 어떻게 살까요?”

 

우리는 믿노라하면서 뻐국이 신앙으로 은혜의 단물은 빨면서 육신을 위해 살고,, 자기 배와 입만 위해서 살지,, 그의 나라와 의

를 위하여 사는데 인색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잠잠하면 돌들이 외치리라”

무슨 말씀인가요?

성도가 전하지 않고 찬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돌들에게 명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성도의 정체를 잃으면 점차로 망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육신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의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깨닫게 하시지만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고,, 깨달았을 때는 큰 자극을 받은 후기에 후과가 크게

됩니다.

성도에게 좋은 믿음이란 거울을 보듯이,, 자주 살피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을 쉽게 여기며 믿는 일이 아니라 크고 무섭게 여기며 섬기는 일입니다.

회개에는 율법적 회개가 있고 복음적인 회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두려워서 회개하는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단 한 번의 회개입니다.

복음적인 회개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자 그 은혜에서 살려고 애쓰는 모든 노력입니다,.

목욕을 하고 수시로 손발을 닦는 일,,우리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2) 어두워진 영감

발람과 같은 사건은 늘 역사교훈이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깨어있어야 하고 그 깨어있음은 죄를 멀리하는 경건이어야 합니다.

지난 주 설교에도 잠시 언급했었지만 성도의 기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직분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혈관처럼 하나님관계가 건강하다면 어린아이라도 그 예배가 열납되고 기도가 상달되며 응답되지만,, 막혔다면

장로목사여도 경건하지 못하면,, 능한 기도 같아도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느낌을 믿는데 결국 신앙의 실패로 삶도 실패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을 잘 믿어야 합니다.

“잘” 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단과 사이비가 많아서입니다.

아님 기독교라 쓰고 불교나 유교로 믿고 있어서입니다.

 

목사로써 그렇고 한 성도로써도 늘 신경 쓰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막힘이 없도록 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삶에 있어서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이 없다면 기도가 막히고 응답도 막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세상 보다는 하나님을 더 인식하고자 하며 사람과의 관계에도 불화가 없도록 하려합니다.

   

진실하고 의롭게 살려하여 천원도 분명히 하고, 약속은 지키고,,,죄에서는 죽고 의에서는 살고자 합니다.

군대교회에서는 “예배자는 단정하고, 예배당은 깨끗하고, 예배는 진중하게 드립니다.”라고 했는데 같은 맥락으로 용사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경건은 많습니다.

경건이 무엇인가요?

칼빈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사랑의 균형” 이라 했습니다.

수직과 수평관계의 조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지옥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기 보다는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의와 선을 행하고,,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등,,실제는 사랑을 이루는 일이고,, 또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님 안에서 다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이루고 살아야 합니다.

신앙은 믿는 현재만 있을 뿐, 잘 믿었던 과거는 소용없고, 잘 믿을 미래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변질은 더럽기도 하지만 무섭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어지럽히고 남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군대도 이단사이비들이 활동합니다.

용사들에게 스마트폰으로 접근하고 인성강사들로 위장 잠입하여 교묘히 교리를 퍼트립니다.

        

결론) 발람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본래의 선지자로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많은 선교사들 중에 이렇듯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고 나귀와 말했던 경험자가 얼마나 있었을까요?

이로써 발람은 하나님을 크게 경험하고 비밀을 가진 선지자가 되었으니 삶도 설교도 달라졌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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