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노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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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믿음으로 당대의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던 신앙인이었습니다.
그 결과 홍수로 쓸어버리는 심판 중에서도 은혜를 입어 가족들과 살았으며 새 세상의 출발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는 구절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1) 튀는 사람
우리는 일찍이 교육받기를 “남들과 함께 살아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하여 절제와 연대를 배웠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공동우물을 쓰는 마을단위의 사회였기에 이런 교훈은 뼈에 사무쳤습니다.
그런데 튀는 행동을 한다? 반대적 말과 행동을 한다?
마치 역린을 건드리는 것 같아 제 정신으로는 어렵습니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을 때 반대한 교회와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산정현교회였고 주기철목사님이셨습니다.
또 조선전체가 식민생활로 신음하고 있을 때 친일파들이 많았지만 항일파들도 많았습니다.
친일이라는 시대와 인물과 함께하지 않은,, 그러나의 신앙이었고, 정신이었고,, 운동이었으며 인물들이었기에 후대의
우리는 그들을 영웅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역사는 이런 ‘그러나’ 로 말미암아 방향이 틀어지곤 합니다.
구약을 보면 선지자들이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고 운둔이나 칩거를 했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 갈멜산,,광야가 대표적인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그곳에 있다며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묻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머문 곳이 편한 곳,, 좋은 곳이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머문 이유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노야 가지 말라” 는 교훈
처럼 세속에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방편인 줄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 주의 일한다고 무리지어 다니며 연대하는 것은 썩 바람직하지 않는 일입니다.
연대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이고 자칫 괜한 정치로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데서 등지는 것이,, 좀 고독해도,, 큰일은 많이 못해도,, 빨리빨리 효과를 못내도 ‘그러나 신앙’ 이 되는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 현대 신앙에는 인본주의와 배금주의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소유냐 존재냐 하는 딜레마처럼,, 교회가 시대에 맞추지 않으면 존재가 어려운 지경이고,, 존재하기 위해서 시
대에 맞추면 또 사람중심이 되어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대에도 맞고 교회에도 맞는 황금 비율이 있을까요?
없기에 믿음이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합니다.
치사하고 비굴하게 살기 보다는 “그러나 거룩한 죽음이 낫도다” 를 확신해야 합니다.
아벨을 보십시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어떤가요? 노아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와는 어떤가요? 사르밧 과부와는 어떤가요? 역시 같습니다.
믿음이 찐일수록,, 클수록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느냐,, 어떻게 사느냐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신앙
그렇다면 지금도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남들은 편하고 쉬운 길로,,더 많은 것은 갖기 위해 구하고 찾는 신앙이라면 진짜는 어떨까요? 세상과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계속적으로,,이런 사람이 있는 곳에는 다툼이 없습니다.
아 있습니다. 자리다툼이 아닌 진리 다툼이,,
제일 좋은 것은 ‘그러므로 신앙’ 입니다.
말씀과 성령께 순종하는,,순전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신앙’ 도 좋은 신앙입니다.
요즘처럼 죄가 심각한 시대에서는 전투적으로 반대하는 ‘그러나 신앙’ 이 절대적입니다.
노아는 이 덕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창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여기서의 노아의 의로움은 완전한 의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가 없습니다.
노아의 실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홍수이후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들지 않았나요?
이 모습이 실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의로움은 당시의 사람들과 비교된 의였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했던 동행적 의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칠흑 같은 어둠에서 작은 촛불이 마치 큰 빛처럼 인정받았으니 놀랍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주의 의에 힘입어 사는 우리는 어떨까요?
노아에게 “방주에 들어가라” 하셨지만 우리에게는 “천국에 들어가라” 하시는 줄 믿습니다.
창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
았느니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책망 받았던 신앙실패부류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대로 금식하고 십일조 생활하는 열심도 좋았고,, 거룩을 지키기 위한 세상과의 분리한 분리주의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자신들이 의를 세우려고 했던 헛수고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훗날 이를 지적했었습니다.
롬10:1~4)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
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
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
의 마침이 되시느라
무늬는 복음적인데 실제는 종교적이니 비기독교이고 반기독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나 신앙”은 인간이나 세상이 아닌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믿음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더 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더 하면 할수록 부족한 기독교가 되고 땅의 복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3) 참 신앙
참 신앙은 주 예수를 믿어 성령께서 선물로 주시는 자유와 영생의 신앙입니다.
자유는 세상자유와 전혀 다릅니다.
세상자유는 이탈과 방종이 있어 자유러울수록 피폐와 탈선과 변질이 있지만,,
주가 주시는 자유는 죽음에서의 자유, 율법의 무게에서의 자유, 죄의 속박에서의 자유입니다.
맛보셨나요? 생활 속에 있나요?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사모함이고 위함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카인 보다 더 신령한 예물을 드렸던 것이고 노아는 방주 짓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유는 언제나 비싼 댓가를 요구하는데 숭고한 핏값,, 때로는 거룩한 핏값입니다.
독립도 그렇고 공산주의에서의 승리도 그렇기에 선혈들은 자기 목숨을 바쳤습니다.
거룩하신 주님의 피도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주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자유를 주시기 위한 속전이었습 니다.
이 값으로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화를 누리며 언제나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는 특혜가 되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세상 모든 사람은 사망의 길로 행진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야 삽니다.
큰 길보다는 협착한 길,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 큰 것보다는 작은 것,, 백마보다는 나귀새끼입니다.
여기에 주님이 오셔서 앞서 가심으로 길이 되셨고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길을 가야하며 본을 보여야 하는데 곧 이 세대에서는 ‘그러나 신앙’ 인 줄 믿습니다.
이 신앙이야말로 큰 신앙이요, 죽어도 사는 신앙인 줄 믿습니다.
결론) 고난 주간의 시작입니다.
한주간만이라도 세상이 아닌 주님을 사랑하고, 낮은 곳을 지향하며 육체의 일을 도모하기 보다는 반대되는 ‘그러나
삶’ 이 있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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