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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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근본주의자인 옛 사도바울이 기세등등하게 교회를 핍박하러가던 중,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셔서 사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이때 사울은 놀람과 두려움으로 되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여러분이라면 무엇이라 했을까요?
이 사건은 그의 회심을 가져다주었습니다.
1) 주여,
특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는 주의 계시는,
그 옛날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셨던 말씀 그 자체였기에 말씀지식이 있었던 그에게는 충격이
었을 것입니다.
나사렛예수가 하나님이셨다니,,정말 부활이 맞았구나,,내가 하나님을 핍박하였다니,,,
이렇듯 하나님은 드물긴 해도 나타나시고 보이시고 말씀도 하십니다.
국민일보의 종교기자가 최근 기도 천사를 만났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 이분은 남을 위해 평생을 기도해 온 장로님이다. 그는 마치 성경에 등장하는 사자처럼 갑자기 나타나 하늘음성을 들려줬
다, 그 음성은 놀라웠다. 마치 내 생각과 마음 상태, 처한 상황들을 속속히 알고 난 다음에 해주는 말 같았다. 그 분과의 만
남은 처음이었지만 그는 나의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할 분들이 있겠다. 혹은 소위 예언기도를
받았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다, 나는 그 장로님께 어떤 요청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기독교역사에 많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시기에,, 찾아주시는 분이시기에,,구원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모하되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말세에는 마귀도 광명의 천사,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식이 중요합니다,.
사울이 “주여” 했습니다.
번역에 따라서는 “선생님” 혹은 “ 당신“ 또 ”주님“이지만,,
우리 성경은 ”주여“로 번역했기에 사울은 하나님을 부른 것으로 봅니다.
“주여”는 하나님의 신약적인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 “주여”를 유대교에 있으면서 얼마나 부르고 외쳤을까요?
오직 종교적이고 관념적이었을 “주여” 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만남의 주님이시고 빛과 살아 계신 주님으로서의 인식변화가 온 것입니다,
이 만남의 사건으로 사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소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신앙에는 기가 막힌 스토리텔링은 없어도 주를 만난 변곡점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예수에 이르는 장성한 믿음,, 혹은 성숙이라고 합니다.
2) 믿음이 경험
부르기만 했고 듣기만 했던 두려운 “주여” 를 실제적으로 경험한 사울은 또 신비한 사건을 연이어 경험하게 됩니다.
18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앞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 홀연히 빛이 둘러 비춰진 일, 다 신비한 경험이었지만 또 자기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진
경험은 경이로운 경험일 것입니다.
그 후 그는 병 고치는 은사도 발휘하게 되었으니 능력이 온 것입니다.
특히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는데 무슨 비늘인 줄 아직도 모릅니다.
각막인지,,분명한 것은 생물적이고 사실이라는 점인데,,벗겨졌으면 아프거나 되레 못 볼 텐데,,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으니
하나님하시는 일의 특징을 알게 됩니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는 기도와 말씀을 듣곤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요? 말할 수 있는가요? 김치 맛은 우리가 알고 말할 수 있듯이,,
세상살이에는 저마다의 비법이 있듯이 주를 만난 이들은 이런 비밀이 나름 있습니다.
사람마다,,신앙마다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지만 꼭 있어야 됩니다.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주의 선물이기에 값싼 선물이 아닌 만큼 사모해야 하고 잘 관리해야 오래 갑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증표여서 세상을 향한 증거가 됩니다.
분당 사랑의병원장 황성주박사는 의사면서 목사이며 아니 멀티 플레이어입니다.
서울대 의대 1학년 때 주님을 만나 삶의 목적과 목표가 송두리째 달라졌고, 세계적인 지성과 영성인 프래시스 쉐퍼를 만나
더 달라졌고, 그의 나이 50세에 또다시 미국 콜로라도에서 자연인의 삶을 몇 년 살면서 경이로운 대자연에서 창조신앙과
구속신앙의 조화를 이루어 절름발이 신앙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했으니 더 달라졌던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이 성숙함으로 2030년 까지 10억 명을 구원하자는 “빌리언 소울 하브스트” 를 선포하여 1년에 백만 마일을 다
닐 만큼의 하나님주신 소명에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면 회심하게 되며 그 안에서 계속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3) 산 증거
박물관에 가면 옛 증거들뿐입니다.
그래서 무슨 박물관이든 박물관은 역사박물관이 됩니다.
그러나 시장은 어떤가요?
흔적이 아니라 지금의 사실이기에 생동감이 넘칩니다.
주가 주신 여러 증거들은 역사가 아니라 지금의 사실이 되어야 됩니다.
22절)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셋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핍박자가 갑자기 변하여 전도자가 되었다면,,적군이 아군이 되었다면,,
당혹한 일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의심하게 되고,, 확인하게 되고,,사울의 경우는 “주여“를 분명히 만났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특징이 이래야 합니다.
작던,, 크던 소동이 일어나고 기쁨과 감사가 일어나야 하는데 곧 생기이고 활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는 없습니다.
이유를 아시나요?
사람은 영적이며 이성적인 존재인데 현대는 성령과 성경의 감화감동 보다는 철학자 칸트의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이성
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살펴보면 언제는 성령과 동행한다고 하더니, 또 성경을 붙든다고 하면서 신학을 붙들었고, 이제는 순수 신학도 아닌 철학
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도, 믿음도, 종교도, 판단되고, 비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행17:11) 뵈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 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
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니
같은 시대의 사람들인데 같은 말씀을 받고서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사모했더니 믿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렇다면 인격도 삶도 데살로니가 사람들 보다 나아졌을 것입니다.
이런 면을 놓치면 안 됩니다.
반대로 불신앙의 말로를 찾아보십시오.
우리나라의 경우 자동차 빵빵 소리도 사나워졌고,
마약과 미성년자 성 착취 사건이 증가하고 점 관련 종사자들과 산업이 넘치고 있습니다,
무엇이 지식이고 지혜인가요? 사나움과 혼돈과 혼란이 넘칩니다.
정치에서 구 권세와 신 권세와의 갈등을 보십시오,
통합의 정치를 한다면서,,헤아림이 없습니다.
교회부터 주를 다시 만나고 나부터 눈꺼풀이 벗겨져야 합니다.
결론) 여러분의 “주여” 는 여러분에게 어떤 하나님인가요?
아나니아의 “주여”와 사울의 “주여“는 같은 말이지만 믿음도 관계도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적이고 아나니아적인가요? 아님 유대교적이고 사울적인가요?
정말 살아계시는 나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하나님이신가요?
아님 관념적이고 무섭기만 한가요?
나의 찬송에 머물러계시고, 기도에 응답하시고, 진실과 성령의 예배를 드릴 때 찾아주시는 나의 주님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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