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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온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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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1-12-19 07:56 조회 38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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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능 프로를 보니 여러 성직자들의 수다가 있었습니다.

마치 종교의 평화가 성숙한 신앙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종교의 화합부터 일치까지 논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은 진리와 비진리로 나누어졌고 사람역시도 정욕적인 사람과 성령의 사람으로 나누어졌기에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던

헤롯 왕 같은 부류가 있고 동방박사같이 산 넘고 물 건너 찾아와 극진한 예물을 드리며 경배했던 부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유유 상종이라고 하는데 진리와 비진리가 일치를 한다는 어렵습니다.

 

1) 예수님

주님은 이런 불신의 세상과 모든 사람들에게 위기입니다.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하셨는데 주님의 말씀을 복기해 봅시다.

“나를 믿는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지 못한 자는,, 듣기는 불편해도,, 그 반대적인 마귀의 자녀임이 명백하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역시, 그렇지 못한 자는 영벌이고 지옥행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확실합니다.

요3:19)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

라

그래서 불신과 비진리에게는 위기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원히 망하는 것은 길이 없고, 약이 없고, 무지해서가 아니라 주님께 마음이 없어서입니다.

주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고 하셨고,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지만

애당초 비진리에 속한사람들은 마음이 아닌 귓등으로 듣게 됩니다.

이 일은 여전하여 겉모양은 같아도 속 생명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 이유가 됩니다.

요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고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오래 전 우리나라 한 선박이 소말리아바다에서 해적에게 납치되었을 때 일이였습니다.

우리 군대가 구출작전에 들어가면서 “엎드려” 했을 때 엎드린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엎드리 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말귀 따라 달랐는데 이 말로 우리국민은 살았고 해적은 죽었습니다.

하나님나라도 마찬가지인 줄 믿습니다.

초대교회성도들이나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이 왜 고초를 겪었나요?

평화를 모르거나 화합이나 일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진리로 비진리를 거부한 까닭입니다.

 

2) 오신 예수

말구유에 오셨던 주님은 장차 영광의 심판의 왕으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재림 때에는 모든 민족이 보며 주님을 찔렀던 자들도 본다고 하셨습니다.

가시적인,,재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주님이 지금 우리 중에 계시다면 어떨까요?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 앞에서 지나가는 나그네 셋을,,천사와 주님인 줄 알아보았고,, 극진히 섬겨 이삭을 낳을 거라는 약속

을 선물로 받기도 했었습니다,

이 안목,, 무엇일까요? 지식일까요? 경험일까요? 훈련일까요? 영생입니다.

참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요,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반대는 애당초 하나님을 알지 못해 믿지도 못해서입니다.

 

지금이 시대는 어떨까요?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다면 알아볼까요? 여러분은 알아볼까요?

예수님당시는 못알아 보았고 되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주님께서 “내말을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을 보고 믿으라” 하셨지만,,

그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스스로가 “우리는 비진리요,, 주님의 반대적인 사람입니다” 를 자백한 것입니다.

 

정호승시인은 ‘서울의 예수’ 라는 시에서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위해서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자락에 기대에 울고 있다”고 했었습니다.

엄욱한 시절의 시였기에 서대문 구치소담에 기대여 울었다지만,, 요즘은 노숙인이나 폐지 줍는 노인들 틈에 계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탄이라고 해서 특급호텔에서의 럭셔리한 1박과 만찬에 비

싼 돈을 지불하는 세상에서는 주님의 음성과 체취를 맡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화려하거나 높은 곳이 아닌 흥청거림 보다 슬픔의 위로가 머무는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학자는 예수가 흑인이었다고 했는데 이때 흑인으로 지시하는 단어는 주님의 피부색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

혹은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된 이들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주님을 연상하나요?

성화에서 보았던 금발의 미남인 백인의 예수님은 무엇인가요?

나의 초라함과 왜소함의 선망은 아닐까요?

과연 팔레스탄에서 태어나 자랐던 예수님은 어떨까요?

피부는 조금 어둡고 코는 뭉툭하고,,머리카락은 갈색이었을,,흠모할 만한 것과 풍채가 없는,,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가

난한 동네 나사렛의 30대 초반의 청년이었을 것입니다.

 

3) 새로운 판단기준

이러한 주님은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기준이 되십니다.

이 주님으로부터 가족이 원수가 되고,, 민족도 원수가 되고,, 세상이 판가를 되기 때문입니다.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지금 같이 평안하고 안정될 때는 모르지만 주님재림하실 때 분명합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에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주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갈등하는 일이 먼저 있지 않겠나요?

옛날 영국은 구교와 신교가 전쟁을 했었는데 좋은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왜 싸우냐고 할지 몰라도 진리싸움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믿는데 어찌 잠잠할까요? 주변의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주님 믿기를 권유했다면,, 그가 분명한 진리의 사

람이어서 그랬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예능프로에 나온 승려는 누나가 집사인데 나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목사님을 모시고 와서 안수기도를 받으라 했기에 안

수기도를 받았답니다.

훌륭한 승려였지만 누나도 훌륭한 신앙이기에 전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껏 전도를 거부했다면 내가 잘나거나 못나서가 아닌 영생이 없는 연고로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된 것입니

다.

 

세상의 판단과 기준은 저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주님에 빗대어 판단하십니다.

“주님을 믿느냐,” 그리고 “주님을 얼마큼 사랑하느냐?”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느냐?”이는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삶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기에 주님으로서의 요청하신 것입니다,

 

또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내가 온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구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말씀대로 사람의 아들로 오심이기에 죄인들의 구원과 관계된 대속의 일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는 성자의 죽기까지의 순종함이었고,

“내가 온 것은” 위엄과 권세의 심판자의 모습입니다.

 

다 같은 한 구세주시고 주님이시지만 성품과 역할은 차이가 있어 입체적인 대상이 됩니다.

예목사님이 있고, 수만이 아빠가 있고, 대한민국민의 예용범이 있잖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을 내 안목으로 치우쳐 이해하고 믿곤 합니다.

“서울의 예수” 라는 시에서는 주님은 초라한 나머지 아버지 품속에 있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가 아니기에 믿거나 경

배하거나 의지할 주님이 못됩니다.

역사 속의 예수는 실패한 혁명가처럼 비추어졌기에 역시 죽기까지 따를 주님은 못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수님은 메시야인 그리스도이시고,, 심판의 왕이시고 참 하나님이시기에 믿음과 경배의 대상이고 두려운

심판주이십니다.

옛사도들이 무엇을 믿었나요? 성경대로 믿었기에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하나님 우편에 앉

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결론) 주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심은 땅에 불을 던지러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한국교회가 일제시대에 천황숭배 했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6,25전쟁도,, 분단의 그 긴 세월도,,아직 아물지 않았음은 참으로 회개하지 않았기에 용서 받지 못했다는 지적입니

다.

우리 어떤가요? 주 오심을 기쁘게 그러나 두렵게 맞이해야 합니다.

“검을 주려 왔노라” “며느리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하려 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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