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
페이지 정보
본문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마지막 강적 장사성과 대진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적의 후방으로 들어가서 협곡에 숨어드는 데 알을 품은 오리 한마리가 길을 막았습니다.
이때 주원장은 진군을 포기하고 오리가 새끼를 낳을 때까지 10일을 기다려 주었습니다.
업보를 믿은 까닭인데,,
그 사이 적의 장수들이 부하를 데리고 대거 투항해서 화살 한발 쏘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큰 전쟁에서도 한 낱 오리새끼 때문에 전쟁을 미루는 장수라면 그 휘하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도 있어 포로를 잘 우대하여 실익을 얻은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긍휼함이 있었나요?
1) 긍휼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사랑과 자비의 성품입니다.
하나님 닮은 사람에게는 있는 반면 동물에게는 없습니다.
긍휼히 있다면 어떨까요?
잡아먹고 사는 육식동물들은 굶어죽어야 합니다.
잡은 동물이 불쌍해서 다 놔주어야 하니,,
반면 사람들은 어떤가요?
학식과 기술이 늘었지만 점점 사나워지고 있습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사나워지고,,조급하고,,원통하며,,긍휼 없는 특징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기자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개가 사람을 물으면 뉴스가 안 되도 사람이 개를 물으면 뉴스가 된다.”
뉴스가 된다는 얘기는 돈이 된다는 의미로써 뉴스가 지저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국제는 물론 우리나라만 해도,,뉴스에는 온갖 추태와 사나움과 더러움이 꼬리를 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천국에는 충만해도 땅에서는 점점 사라지고 있어서 더 합니다.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에게는 자연스런 성품이어도 땅에서 난 정욕적인 성품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좋은 세상은 기술문명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는 하나님나라로 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한 재벌그룹은 전담부서까지 두어 의인을 찾아 상을 줄까요?
내가 아는 시의원이 동네편의점에 갔다가 강도를 붙잡아 표창을 받았습니다.
실제는 이런 의인 보다는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는 의인이 많아야 세상은 밝고 명랑합니다.
정치가 항상 뉴스의 중심인 것은 언제나 유감입니다.
긍휼과 용서가 없어 교육에도 좋지 못하고 삶에도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어서 입니다.
우리는, 성도는,,애굽에 살고 있지만 유목민으로써 공동체로 살았던 옛 이스라엘처럼,,
세상에서도 천국민으로 살아야 합니다.
2) 주님은
주님은 사랑이기에 이 긍휼을 가르치셨고 생활화하셨습니다.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실제 주님은 이 세상사는 동안 긍휼을 수없이 베푸셨어도 받지는 못했습니다.
막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 “불쌍히 여기사” 또는 “긍휼히 여기사”는 주님의 어떤 기적이나 설교의 이유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인격일수록 긍휼이 있고 성도에게는 확실히 있는 성향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나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하며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니 신앙이 건조하고 간구는 생떼가 강조되곤 합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분명히 강조된 말이 있습니다.
“법과 원칙에 의해서” 정의와 진리로 세워지는 듯해도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경영이든 통치든 “법과 원칙” 말고도 덕이 있어야 하고 민심도 살펴야 합니다.
긍휼은 덕에 속한 만큼 지도자의 덕은 물론 국가의 덕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특별히 성도는 만가지 은혜를 하나님께 받은 사람입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수십조를 받은 사람인데 몇천만원 빚을 탕감해주지 못한다면 그 은혜는 어떤 은혜일까요?
그래서 형제나 이웃이나 교인이나 교회의 다툼으로 세상법정에 나가는 일은 거룩의 훼손이 되고 불신앙이어서 손해를 볼지언
정 금지할 덕목입니다.
특히 모든 판단은 하나님이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긍휼은,,주님의 성품이고 천국의 덕성입니다.
이 긍휼히 있을 때 언제어디서나 하나님 나라가 임한 줄 믿습니다.
그러나 작은 손실이나 손해를 싫어하고 양보만 해도 지는 것이나 실패로 착각한다면 세상살이가 살벌합니다.
지금이 그런 때가 되었기에 식당이나 비행기에서 아가가 울어도 미안해하지 않고,,
또 그렇다고 욕하고,,자동차도 양보를 거부하여 겁나는 세상입니다.
3)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십자가 위해서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을 도리어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비슷하게는 돌 탕에 맞아 죽었던 스테반 집사도 그랬습니다.
행7:59~60) 그들이 돌로 스테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주님과 스테반 속에는 분노나 복수심이 아닌 긍휼히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어서 진 것 같으나 아닙니다.
승리였던 것입니다.
반면 요나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로 복음을 들고 원수국에 갔지만 긍휼 보다는 적개심을 갖고 갔습니다.
자연 원수국에게 구원의 팔을 내 미신 하나님이 좋을 리 만무였습니다.
그런 요나를 깨닫게 하신 것이 박 넝쿨의 교훈이었습니다.
욘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
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
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삽니다.
그렇다면 살면서 긍휼은 받기도 하고 이루기도 해야 합니다.
야곱의 12아들 중 유다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긍휼히 있었기에 요셉이 시기 받은 형제들에게 잡혀 죽게 되었을 때 형제들을
설득하여 팔려가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가문을 통해서 오신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긍휼히 여겼던 복입니다.
결론) 부자 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구하고, 장수 보다는 심령이 가난함을 구하고,
건강 보다는 긍휼을 구하는 신앙이면 어떨까요?
주님은 긍휼 있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잠12:10) 의인은 자기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