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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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들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등병 때에는 참을 인을 배우고 일등병 때에는 배울 인을 배워라
상병 때에는 어질 인을 배우고,, 병장 때는 사람 인을 배우라.
1) 인류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고 고난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어느 민족이든 원시역사든 근대역사든 보면 다 똑같은 고난사만 남습니다.
우리 아버지엄마의 삶도 마찬가지이고 아직은 미완의 청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많고 고민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틀림없는 진실 하나가 있습니다.
내 역사고 우리의 역사이며 사람의 역사이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런 진실을 사람들은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비밀을 계시하셔서 비로써 알고 되고,, 믿게
되며,, 삶의 주관을 내가 아닌 주님께 맡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주여” “주님”이라는 고백이 이 뜻인 줄 믿습니다.
이는 회개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장군장로님이 신앙 간증 책을 내셨습니다.
군선교로 뜻을 정한 후 육사에 지원서를 내면서부터 전역 후 국방부고위공무원 근무까지의 40
년 남짓한,, 청춘이 녹아 있는 자서전이기도 했습니다.
특이하게도 목차를 보면 큰 단원 안에 기도응답 1, 기도응답 2, 기도응답 36으로 마쳐졌는데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인도하심을 받았던 일들이었습니다.
이런 동행이 쉬운 것 같아도 얼마나 어려울까요?
하나님이 인생이 아니시기에,,,그렇습니다.
성경의 인물도 그랬고,, 목사님이든 누구든 어떤 마음과 생각이 주장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흥망의 결정이 되고 꽃길이냐 사막길이냐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정욕과 탐심이 붙잡히면 개인은 이혼이나 죽음에 이르고 권력자는 전쟁도 일으킵니다.
아니 주변을 보십시오.
생존에 매달릴 때에는 멋내기와 취미생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일에 팥 놔라 콩 놔라 하는 때는 먹고 살만한 때고,, 손톱발톱에 치장할 때는 모
든 여유가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환경만이 아닌 마음과 생각에 사랑이 주장해도 그렇습니다.
노사연님의 “바램”이라는 곡에도 그런 고백이 있습니다.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마디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 준다면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한다니,,”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나를 돕는 자시며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이심을 믿을진대 어떨까요?
고난은 하나님께서 나를 갖고 시험하거나 장난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의 품으로 부르
시는 손길이고,, 내 알량한 자아를 깨트리시는 방편이 되어 결국 복이 임하는 준비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2) 고난과 세상
파도 없는 바다는 고요하긴 해도 힘이 없어 작은 범선이라도 움직이질 못합니다.
고난 없는 세상은 좋을 듯해도 행복도,, 보람도 없고 그 사람은 나약해서 쓸모가 없습니다.
바람을 맞아야 꽃도 향기가 좋아지고,, 풀도 뿌리를 내리고,, 대추도 맛이 들 듯이,,
사람이 그렇습니다.
흔히 “인간미가 있다” 가 무얼 말하나요?
인정이 있다는 말인데,, 그냥 되질 않습니다.
용사는 훈련으로 만들어지고 사람은 고난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렇지 못하면 이상한 종자입니다.
시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러므로 고난은,, 성도는 물론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나 쉬지 못하지만 주께로 더 빨리 가는 순풍이기도 하고,, 때로는 광풍이고,,역풍이기도
하여 마주칠 때와 피할 때를 구별하는 지혜가 요청됩니다.
“욥5:7)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고난이 나를, 뭇사람을 위로 날리기도 하지만 자칫 다 태우기도 하는 위력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이 소는 고삐로 다스리고,
맹수는 먹이로 다스려도 고난은 다스리지 못하기에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
고난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슬기로운 지구생활이 됩니다.
미련함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맞서는 일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를 배반하거나 우리의 믿음을 부정하는 일이라면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마귀는 먹는 일을 갖거나,,다수의 의견을 따르거나 하도록 하여 교묘히 합리화시키곤 합니다.
역사에 있어 죽었으나 산자가 있고 살았으나 죽은 자가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불행과 위기 앞에서도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훅 하니 세워지고,, 결정 짓게 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예수님 안에서 머물러야하는 것입니다.
3) 관조
우리 신앙은 세상과 사람과 고난을 관조해야 합니다.
관조는 관망과는 좀 다른 유형으로 편견 없이 밝게 보는 눈길입니다.
세상은 다양해도 일괄성이 있으며 사람역시 천인천색이어도 일색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았고,, 영생을 사모하는 존재여서입니다.
고난은 어떤가요?
겨울처럼 왔다가 봄처럼 떠나기도 하는데 꼭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옷이 달라지듯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전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
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고난을 딛고 일어나면 영웅이 되고 전설이 되곤 합니다.
역경을 딛고 일어나서 재기에 성공한 사업가가 많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선한영향력은 책 몇 십 권 읽어 나오질 않습니다.,
람보가 그냥 람보가 아니잖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저마다의 맞는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나 없다고 “얏샤” 할 일도 아니고,, 있다고 “음메” 할 일도 아닙니다,.
나 없다면 고난당하는 자를 격려해야 하고,, 있다면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면서 묵묵히 따라
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마지막 고난은 무엇일까요?
“고난을 위해 태어났으니”
죽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이 원수와 마주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원수를 먼저 마주치셨고 그 싸움에서 이기신 줄 믿습니다.
생애의 마주쳤던 모든 고난은 이 마지막 고난을 위한 예비고난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고난이고,, 삶 전체가 고난이며 마침내 눈 감을 때도 고난입니다.
이는 천국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천국은 모든 수고와 고통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객지생활을 하면 할수록 고향이 그립고 집이 그립 듯이,. 죄가 많고 곡소리가 많은 세상은 천국
을 사모하게 합니다.
결론) 고난이 있거든 천국을 사모하십시오.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나라이지만 그 믿음은 고난에서 빛나는 정금된 믿음이어야 합니다.
천국의 12진주문은 불같은 시험을,, 고난을 통과한 성도들의 입성문입니다.
진주가 고난 속에서 영글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품어 진주로 만드시는 은혜를 사모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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