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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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사과에는 분명한 대상이 있고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에 하고서도 말을 듣고 욕도 먹습니다,.
우리의 감사대상은 하나님이시고 내용은 조건적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조건적인 감사는 일반적이라면 그렇지 않은 경우는 믿음의 경우입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감사가 없다면 어떨까요?
미숙함인데,, 어릴수록 떼는 써도 감사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1) 감사
성경에는 감사하라를 찬양하라와 함께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특기라서 그렇고,, 또 하지 않으니 가르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감사하지 않으면 누가 감사할까요?
또 우리가 찬양하지 않으면 돌이 찬양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영적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원망불평이 나오고 찬양도 못하면 인격은 물론 삶도 피폐해 집니다.
그러므로 주신 은혜를 헤아려 보아야 하고,, 믿음으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게는 손녀와 손자가 태어났습니다,
손녀를 보면 슬프고 손자를 보면 기쁩니다.
그래서 부부가 울다가 웃다가 합니다.
손녀를 생각하면 슬퍼서 감사가 나오질 않습니다.
되레 왜요? 언제까지요? 가 나옵니다.
며칠 전에 누가 그랬습니다.
“요즘 기도하려면 원망불평이 나올 듯해서 잘 못하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기도하라 해서 했고요, 명하라 해서 했고요, 믿으라
해서 믿었는데,,결과는 그렇지 않기에,,”
무슨 말인가요?
조건이나 상황을 보아서 그렇습니다,
이성적인 감사는 여기서 나옵니다.
이런 일반적인 감사는 보이고 만져지는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다운 감사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감사가 있습니다.
성도의 감사인데 비교적 큰 감사요, 성숙한 감사로써 “그리 아니할지라도” 의 감사입니다.
곧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는 감사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는 감사인 것입니다.
기도하려면 원망불평이 나올 것 같다던 그 부부가 아가가 퇴원하면 드릴 감사예물을 일찍이 한푼 두푼 저축하는 모습을 보았습
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예물을 미리 드리겠다며 적당한 곳을 찾는 것을 보았을 때 감동이었습니다.
아가가 낫지는 않았지만,,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행여 마음 바꿀까 봐 미리 드리겠다고 했으니,, 무엇인가요?
그럼에도 그 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흔하지 않는 모습이기에 성숙한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배경에는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라” 가 깊이 있는 모습입니다.
2) 이성과 믿음
이렇듯 우리는 몸과 영혼이 함께 있듯이 이성과 믿음이 함께 있습니다.
마치 맑은 날과 흐린 날이 하루 속에도 혼재되어 있듯이,,
세상사는 우리는 주님과 동행도 하기에 이성과 믿음이 다르게 활동합니다.
그러므로 상황과 조건도 보는 이성적인 신앙도 있고,, 나아가 이성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보는 성숙한 믿음도 있습니다.
무엇이 틀리고 무엇이 옳다가 아닌 다 귀한 믿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자원함으로,, 찬양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곧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의 의미를 아시겠나요?
“육으로 난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하셨으니 보다 더 성숙한 믿음으로 옮겨야 합니다.
마치 기차나 비행기에 다른 등급의 좌석이 있듯이 우리 삶에는 다른 등급의 감사가 있는데 조건 따라 감사에서 성령을 따라 성
숙한 등급의 좌석으로 옮기는 것이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가 되는 줄 믿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백성들에게 크게 나타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이때 왕은 몇 사람을 선지자에게 보내 자기들을 대신해서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들은 화만 면피할 생각만 있을 뿐,,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불의한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심은 회개였고 정의와 긍휼이었습니다.
렘2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
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아주 옛날 말씀이지만 이 통치원리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변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회개하지 않아 철저히 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본 받아야 하나요?
입술의 감사가 아니라 삶이 주님과 동행하여 정의와 거룩과 인애와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감사도 좋고, 한 주간의 감사도 좋고, 한 달이나 1년의 감사도 좋습니다.
자기 형편과 믿음 만큼이기 때문입니다,.
3) 가난 중에 감사
요즘은 고통이 증가되고 있습니다.
고물가가 주된 원인인데 20대와 60대에서 가중되고 있습니다.
20대는 아직 사회기반이 약하고 60대 역시 은퇴 후라서 그렇습니다.
같은 1만원인데도 이들에게는 더 크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없으니,, 두문불출은 기본이고 식사도 굶기가 태반입니다.
내년과 후년은 더 힘들다니,,감사는 마르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좀 다르게 나타납니다.
극심한 가뭄에서도 주의 사자를 섬겼던,, 자신과 아들은 어쩌면 그 한 끼가 없어서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기꺼이 주
를 섬기는 마음으로 드렸더니 되레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들도 그랬습니다.
고후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세상은 “곳간에서 인심 난다” 고 하지만 성도는 달라야 합니다.
추수 때도 인심이 나야하지만 일상에서도,, 그리고 고난 중에서도 인심이 나야합니다.
곧 믿음이고 은혜의 감사보답이어서 입니다.
결론) 추수감사는 1년을 돌아보는 감사이고 예배입니다.
모든 것이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사회적으로는 불황이 짙고, 이태원 참사 슬픔이 가시지 않았고,, 정치적 갈등이 크고,
개인적으로는 온갖 문제로 점철되었다 해도 믿음으로 감사를 심어야 합니다.
유대인으로써 나찌수용소에서 매일매일의 죽음의 순례를 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은 예스”라고 했던 빅터 프랭클린
의 고백처럼 긍정과 감사는 최고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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