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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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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5-07-26 15:21 조회 1,05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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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태양열에 녹는 물체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굳어지는 물체가 있습니다.

닥친 환난 앞에서 주저앉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강해지는 이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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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난 유형

국가와 시대와 개인마다 환난이 다릅니다.

북한은 지구상의 국가 중, 복합의 환난국입니다.

식량난, 인권의 부재, 요즘은 기근까지 왔답니다.

시리아는 자유가 부재이고 그리스는 경제의 환난을 당했습니다.

또 장차 어디는 기후 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회는 박해를 겪었는데, 정치적 난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론 작은 돈에 고통을 당하는 이가 있고 큰돈에도 무관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환난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죽게 되었다는 형편이고 위로가 절실하다는 겁니다.

 

2) 위로 필요

사도바울은 온갖 환난을 겪은 장본인입니다.

바구니를 타고 성 밖으로 도망도 했었습니다.

자연 위로에도 대가이기에 큰 환난을 겪은 교회에게 참 위로를 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의 환난은 전쟁이나 기근이 아닌 예수 믿는 신앙 때문에 온 핍박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한 그의 위로를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느 경우 위로 받나요?

어느 연예인은 사업으로 수억을 잃어 속상했는데 다른 연예인이 자기 보다 더 큰 수십억을 잃었다는 말에 위로가 되었답니다.

일종의 ‘비교적 위로’입니다.

내가 그럼에도 낫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주는 위로는 다릅니다.

바울자신이 주는 위로도 아닌 주의 위로 인데, ‘은혜의 위로’입니다.

고후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이 은혜의 위로는 맞춤식인 만큼

첫째는, 상황을 견디게 합니다.

고후1:6) ~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좋다는 것이 좋다는 식이 아닙니다.

고난의 유익이 있습니다.

이때는 고난이 과정이 됩니다.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과정은 필수인데, 이 경우 좋아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마쳐야 좋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홍어가 숙성되어 맛의 풍미가 깊듯, 인간미가 성숙되고 신앙도 거룩이 발전 합니다.

다윗의 고백인데 음미해 보십시오.

“시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훈련소의 모든 고난의 과정을 마쳤더니 비로써 군인이 되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는 선언은 주를 믿는 그 순간에 부여받았지만, 그 의인의 삶은 꾸준히 배워야 합니다.

배움 속에는 하나님의 예정된 프로그램을 따르기도 하지만 나의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 체득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하면 성공은 없고 실수를 두려워하면 시도를 못하는데 성도는 실패와 실수의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주 안에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건져내심입니다.

고후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이 건져내심에 있어 소극적 표현은 “피할 길을 주심이며, 적극적으론 ‘건져내심’입니다.

훈련받는 군인에게 가장 요청되는 일은 생명이기에 안전 우선입니다.

부대와 지휘관은 훈련생의 생명의 안전에 만전을 기합니다.

난관을 통과할 때는 이중 삼중으로 줄을 걸고, 망을 치고, 앰뷸런스와 의사를 대기시킵니다.

보기에도 든든합니다.

 

성도의 환난에서도 그렇습니다.

천사가 함께하며 피할 환경과 도울 손들을 준비시켜 놓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를 보기보단 믿어야하는데, 여기서 실패를 합니다.

이때 앞선 환난을 겪은 경험자가 곁에 있어야 좋습니다.

게임에서 훈수자는 쉽습니다만 당사자는 곤혹스런 것처럼 환난의 경우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험자의 훈수가 필요합니다.

“고후 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3) 위로자의 역할

혹 속에 있는 말을 하려다가 오히려 면박을 들은 적 없나요? 물론 이 방식도 필요합니다.

“나 아프다” 고 하는데, “나 죽겠다”고 하는데, “뭘 그 까지 것 갖고 그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아파” “얼마나 힘들어“하며, 손 만져주고, 지갑 여는 일이 참 위로자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모든 성도는 위로 받을 자이며 또한 위로자입니다.

고후 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 앎이라

이 말을 넓게 해석해서 적용하면 성도는 세상의 환난 받는 뭇사람들에게 참 위로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위로자가 될 수 있고 어른은 아이들의 위로자가 됩니다.

무엇이 위로자가 되게 했나요? 앞서 사랑과 경험이 이해와 배려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주의 위로를 경험한 이들입니다.

“고후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아니면 이 위로를 위한 자로써 환난을 경험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일은 놀랍고 신비하고 위대한 일입니다.

 

정원수나 가로수 한그루를 위해 여러 개의 버팀목이 소용되듯이, 환난 받는 자를 세우기 위해 성도가 앞서 버팀목이 되고자 앞서 경험하며 위로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의 겪은 모든 환난은 그 위로를 안 후, 초기교회들을 환난에서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고후1: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누가 이렇게 조화를 일으키나요? 사도도 아니고 환난 중에 있는 괴로운 이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이 망가지고 얽히고 찢겨지고 난리 통에 있는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이루십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4) 찬송의 대상

“고후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얼마나 확실한 경험의 고백이고 지시인가요?

배고픈 사람에게 “자 밥이다. 실컷 먹으라” 하는 모습입니다.

죽을듯한 환난의 성도에게, 혹은 사람에게 “ 찬송해,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이시기에 확실히 구원하셔, 걱정 마, 이 형편을 아셔, 위로하시고 또 건지셔~”

 

이처럼 분명히 제시할 수 있나요?

두려운 상황에서 불확실한 미래의 위로를, 그렇다면 환난은 더 이상의 환난이 아닐 것입니다.

“고후1:9)~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결론) 초등학교 선생님이 한 학생에게 지구가 둥근 것을 설명하라했습니다.

학생은 명답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지구가 둥글다고 하셨고, 선생님도 그러셨습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인생에게 슬픔과 고난이 있고 또 위로가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는 답은 우리가 구할 바가 아닙니다.

환난이 있다면 주의 위로가 꼭 임하는데 이를 소망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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