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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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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5-08-30 13:33 조회 98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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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진보했기에 색다른 문명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영상통화, 보이는 라디오,

이제 듣는 수준에서 보기도 하는 수준까지 열렸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아닌 경건에 이보다 앞서 진실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기도입니다.

 

1) 기도의 자리

사임하신 강도사님은 분주하던 철도 지났고, 담임목사님의 부재로 모든 예배에서 설교하게 되었기에, “이제 기도의 자리에 나갑니다.” 했습니다.

이처럼 흔히 기도는 입으로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자리’ 란, 이 시간을 더 많이, 혹은 장소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은 포로된 바벨론에서, 조국인 예루살렘의 성전을 향하여 날마다 3번씩 기도했습니다.

우린 이 기도를 종교적기도, 혹은 의전적기도라 합니다.

주님도 이 기도를 습관대로 새벽미명에 동산에서 하셨습니다.

위와 같이 모든 종교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교도들도 메카를 향해 하루 5번씩 경배를 합니다.

 

이 기도 중요하며 이 예배 중요합니다.

비롯 전통적이고 습관적이라도 경건한 습관인 만큼 일찍이 익히는게 좋습니다.

전도사들이 새벽기도회를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습관되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주님의 가르침은 이를 능가합니다.

 

2)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본문에는 기도의 키가 나옵니다.

기도가 하늘 문을 여는 키인데, 거기에 또 키가 있답니다.

 

이스라엘의 히스기야왕은 적군이 쳐들어오자 그들이 보낸 선전포고문을 펼쳐놓고,

왕하19:16)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백성들을 대표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역하 6:40)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

 

이 두 왕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보신다였습니다.

 

현대의 성도들과 얼마나 다른가요?

그러다 보니 경건에도 차이가 왔습니다.

옛 성도들은 이 믿음 속에서 기도했기에 더 단정하고 더 삶의 적극성을 발휘한 반면 현대의 성도들은 기도만 있고 삶은 흩어졌으며 소극적인 삶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를 깨우친 것입니다.

“구하라” 무엇으로 구하나요? 입으로,

“찾으라” 무엇으로 찾나요? 눈으로,

“두드리라” 무엇으로 두드리나요? 손으로

 

지난 17일은 극동방송사에서, 여수남부 지사방송을 위한 생방송모금이 있었습니다.

10억 모금이 목표였는데, 20억이 되었습니다.

그때가 언젠가요? 남북 간의 긴장이 가장 고조됐을 때,

지금 경제가 막 흔들리고 있는 그 상황에서 넘친 것입니다.

16년 동안 기도한, 국내의 마지막 방송을 위한, 섬지역과 여수남부의 난청지역을 위한 모금이었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방송사는 이를 위해 “구하라”하여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찾으라”하여 목사님과 교회들에게 브리핑하고, “두드리라“ 하여 전국에서 방송한 것이 아닙니다.

55년이 넘는 세월동안 24시간 찬양과 말씀을 전파하며 청취자들을 섬겼던 바, 이제는 그 청취자들로부터 십시일반의 응답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을 유심히 보십시오,

적극적인 삶의 기도자태 보다 더 큰 것을 강조했습니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3) 그러므로

“그러므로”는 어떨 때 쓰나요? 설교나 연설이나 강연의 시작에서 쓰질 않습니다.

“그러므로”는 앞선 문장과의 연결인 부사입니다.

“결론으로, 다시 말하면” 식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기도란 “그러므로”가 중요합니다. 기도가 무엇이냐? 다음은 답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여기에 좀 더 성숙하다면, 먼저 대접하라 여야 입니다.

 

이 기도를 ‘생활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도 보시기에, 믿음의 두 왕과 선진들은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한 것입니다.

주님의 화법으론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 인 셈입니다.

 

어느 권사님이 새벽기도회에서 늦도록 기도하다가 집에 가면서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마침 마지막 교회당 정리를 하고 뒤따라가는 전도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남의 집 호박밭에서 호박을 따 옷으로 가리고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있으랴”하며 찬송하고 갔답니다. 이런 기도는 어떨까요?

 

최근 목사 변호사한테 들은 말입니다.

목회하다가 변호사를 하니 별세계였답니다.

어느 날 동료 여변호사가 “성도”가 뭐냐고 묻기에, 거룩한 무리라고 귀뜸했더니 동료변호사가

썩소를 짓더랍니다. 며칠이 지나도록 그 썩소가 생각나 다시 물었더니 자기가 맡은 사건 중에 목사가 장로를 사기꾼이라 고발하고 장로가 목사를 악질이라며 고발한 사건이 많아서였답니다.

이런 경우 어떤가요?

 

기도는 하나님께 나를 의탁하는 일도 되지만 주문대로 되는 요술 망망이는 절대 아닙니다.

주께 의탁했으면 그 후 내가 책임 있는 행위를 이루는 일입니다.

 

대한민국 여성 첫 총리가 뇌물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그녀는 성경책을 들고 재판정에 갔습니다.

참으로 성경을 믿는다면 그녀는 뇌물을 받지 말아야 했습니다.

 

지난 주간에 내 입에서 맴돌았던 말이 있습니다.

“저들은 십자가를 이용했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신학자 본회퍼의 옥중서신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미국의 예일 대학교의 교수였던 본회퍼는 나찌당이 득세하자 고국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나찌의 원흉인 히틀러를 암살하는 일에 가담하다가 처형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삶의 기도를 들으신 줄 믿습니다.

히틀러와 나찌당은 망했기에,

 

사도행전에도 비슷한 경우의 말씀이 있습니다.

행7:54~5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테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기도 하지만 보기도 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셨고,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셨지만 죄인처럼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최고의 보시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되길 바란다면, 기도보다 삶을 성찰해야 합니다.

능력의 기도가 되길 바란다면 청산유수보다 삶이, 보여져야 합니다.

마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6:9~10)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결론) 주님이 가르켜 주신 기도의 원리 아닌가요?

하지 말아야 할 기도와 해야 할 기도로 구성됐다면 청산유수 보다는 삶이었습니다.

사랑, 용서 등이 아닌가요?

 

우리의 기도는 어떤가요?

듣기용도의 기도인가요? 아님 듣고 보는 용도의 기도인가요?여러분이 기도를 들르시는 주체라면 어디에 점수를 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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