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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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 는 말이 있고, “벼룩이 간을 빼먹는다.” 는 말도 있습니다.
이 둘은 ‘아주 작은 것’을 자발적인 의미로 나눌 때와, 강압적인 의미로 나눌 때의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어느 상황인가 살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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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황
엘리야 선지자는 가뭄이라는 엄청난 국가적 재앙을 선포한 후, 아합 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앞서 그릿 시냇가에서 숨김을 당했던 엘리야는 이제는 왕후의 고향인 사르밧으로 숨어야 했습니다.
그릿시냇가에서 까마귀로 하여금 떡과 고기를 공급하게 했던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에게 공궤를 명하셨습니다.
9절)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이제 엘리야는 이 말씀을 믿고 과부에게 떡을 청합니다.
11절) ~너는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나 그들의 상황은 너무 불량했습니다만 엘리야는 적극적이었습니다.
12절) ~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그냥 떡 한 조각이 아닌 “작은 떡~”을 요청했으니, 여기까지 보면 아주 치졸한, 벼룩의 간을 빼먹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이 즉각적인 순종을 갖고 와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 아름다운 상황”으로 전환되었습니다.
15~16절)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2) 믿음의 근거
믿음은 행동을 발휘하지만 그 믿음은 내용과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 오라” 믿음의 행동은 하나님 말씀이 근거였습니다.
9절) ~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과부 역시 죽고자함을 멈추고 엘리야 말대로 작은 떡을 만들어 먼저 엘리야를 공궤할 수 있었음도 엘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14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믿음은 순종이란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비굴하게도, 비참한 과부에게 먼저 “너는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와라”했던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떡 맛을 알아서도 아니요, 과부이기에 만만히 보아서는 더욱 아닙니다.
망설이는 과부를 향해서 다시 한 번 촉구할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13절)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
하천이 모여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이 바다를 만들 듯이, 하나님의 경험, 그 말씀의 경험들이 모이고 모여 불신의 시대와 왕 앞에서 조차 담대하고, 과부에게도 과감히 손 내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과부는 어땠을까요? 이 한 번의 순종으로 큰 경험을 했을 텐데, 그 후 계속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자세는 당연한 것입니다.
얼마 후 그 과부는 아들이 죽자 엘리야를 찾아 하나님께 의탁하는 큰 믿음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24절)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
그러므로 믿음은 첫 번째 순종이 중요합니다.
엘리야는 많은 경험자였고 과부는 이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가요? 성경을 아는 것과 믿음의 순종은 다릅니다.
어느 날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이 떡 한 조각을 청하던지, 혹은 아주 작은, 그러나 마지막 보물을 내놓게 될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나요?
3)살리는 상황
하나님은 담대한 믿음의 종을 통해서 과부 집을 살리셨고, 첫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서 엘리야와 자신들을 살리게 하셨습니다.
굳이 큰 믿음이라면 엘리야 보다 과부가 맞습니다.
엘리야는 일찌기 많은 기적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면 과부는 죽을 상황에서 마지막 보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종종 교회마다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 라며 홍보를 합니다.
혹 보셨나요?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설교가 좋다는 의미 아닌가요?
그러나 모든 교회는 설교가 다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좋은, 살아있는 말씀인 만큼, 설교만 잘해서가 아니라 순종해야 진가가 발휘되고 이때 “말씀을 살리는 교회”가 됩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 보다“말씀을 살리는 교회”가 더 좋은 교회입니다.
현대처럼 듣기만 잘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살아 있는 말씀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여러분은 이런 진술을 하나요?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나요? 이런 경험이 날마다 있다면 어떨까요? 왜 현대는 없을까요? 말씀은 홍수를 이루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치 않고 믿지 않고 순종치 않기 때문이요, 둘째가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하질 않아서 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그 무엇이 많고 더불어 취해서 살기 때문이지요.
존경하는 목사님과 식사를 했습니다.
그동안 교회의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면서 “드디어 1억짜리 십일조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헌금 때 “우리 교회에 1억 십일조가 있게 하옵소서” 하며 축복했더니 기복신앙이라며 거부하고 비토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떠나고 나자 비로써 생겨 저들의 입을 막게 됐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기록되신 예수님이십니다.
따지고 이해하려 하고 한다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일과 같습니다.
객관적인 1인칭 성경말씀을, 주관적인 3인칭 말씀으로 듣고, 삶의 2인칭화 시켜야합니다.
곧 살아있는 말씀의 비결이고 말씀을 살리는 신앙 비결입니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비참하다고해서 한 조각 떡을 청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엘리야는 굶고 그 믿음의 성은 무너졌을 것입니다만 순종하므로 굳게 되었습니다.
과부가 불순종했다면 어땠을까요? 엘리야는 어떻게든 살았겠지만 과부와 아들은 생각대로 자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믿음이 모두에게 삶이라는, 하나님 경험이라는, 선물을 준 것입니다.
4)언제나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기에 말씀도 변함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천지가 변하는 것이 주의 말씀의 한 획 바뀌는 것 보다 쉽겠다하셨나요?
지금도 주님은 누군가를 통해서 “떡 한 조각을 달라”하십니다.
믿음 없어 망설이면서 구차히 설명하면 이젠 “작은 떡을 먼저 달라” 하십니다.
주님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 손위에 얹은 그 떡을 축사하시고 오병이어를 만들기 원하셔서입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엘리야와 과부를, 이 기적의 동업자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금번 시리아 사람들과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으로 도망가는 정세를 압니다.
철조망을 넘고, 해저터널로 가고, 조각배를 타고가고, 거반 죽습니다.
최근 1년 사이에 3500명의 탈출민이 지중해에서 수장되었다니 하루 10명꼴입니다.
며칠 전에는 3살짜리 아이의 주검이 휴양지해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IS를 피해 시리아 탈출했다가, 캐나다 난민 신청거부에, 지중해를 건너려다 해안 5Km 남겨두고 전복된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자유요, 떡입니다.
이들이 누군가요? 혈통과 국적을 초월하면 누구인가요?
이들의 자유를 위한 기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작은 떡을 나누워야 합니다.
작은 떡을 나누지 않겠다고 서로 떠밀다가 이 사달이 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3살짜리 주검을 통해, 그 아주 작은 떡을 통해 난민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계시니 본문의 기적이 재현된 것입니다.
결론) 주님은 우리에게 있는 떡 한 조각, 어쩌면 과부에게 있던 마지막 한 끼의 아주 작은 한조각을 지명하시며 “공궤하라” 하십니다.
그 덕에 내가 받을 때도 있지만, 반대로 그 덕에 내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삶이되기도 합니다.
알량한 떡 보다 하나님과 그 말씀에 주목하시고 믿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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