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제일교회
홈로그인
HOME · 설교&칼럼

행복자 > 설교말씀

행복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7-05-28 13:28 조회 584회 댓글 0건

본문

최근 서울역 광장에 버려진 신발 수 만 컬레를 설치해 놓고,

작가는 예술이라는 반면 행인들은 흉물이라며 제거했으면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이 차이, 프레임의 차이입니다.

동일한 모양이나 현상도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의식이나 생각의 차이입니다.

본래 프레임은 창틀인데 어떤 창틀을 통해 보느냐를 말합니다.

현대는 이 프레임이 다양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아나운서의 옷깃이 서로 짝짝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요즘 패션인 언바란스 랍니다.

머지않아 신발도 바지단도 짝짝이가 나올 것입니다.

 

1) 프레임

프레임에는 여러 요소가 작용합니다.

사실적이냐 진실적이냐, 동양이냐 서양이냐,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애냐 어른이야 등,

세계관에 따라 천차만별이 됩니다.

이 프레임을 옳게 잡아주는 것이 교육이고 신앙이며 정치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금번 대통령선거로 우측프레임에서 좌측 프레임으로 이동한 것을 증명했습니다.

 

여러분의 프레임은 어떤가요?

기도하면서 텔레비전을 보면 안 되겠지요?

기도는 하나님 전에 엎드린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텔레비전 보면서 기도할 수는 있나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니,,

 

여자 대학생이 술집에서 밤에 호스티스로 일하는 것은 어떤가요?

아님 술집 여성이 밤에 일하면서 낮에 대학교를 다니면 어떨까요?

 

금 한 삽과 흙 한 삽 중 무엇이 귀중하냐고 묻는다면 어떨까요?

다 금이 귀중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꽃씨한테 묻는다면 금이 아닌 흙이 귀하다고 할 것입니다.

흙에서 싹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사막을 좋아하는 청년과 결혼한 여성이 황량한 사막생활에 지친 나머지 엄마께 편지를 썼습니다.

“엄마, 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사람이 살기에는 이곳이 너무나 끔찍합니다.”

엄마한테 아주 짧은 답장이 왔습니다.

“두 사람이 철장에 갇혀서 한사람은 철창을 보았고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그녀는 엄마의 뜻을 깨닫고 별을 찾기 시작하여 마침내 별전문가가 되었답니다.

 

우리에게는 동양적인 그리고 대한민국의 분단의 아픔에서 빚어진 프레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언제나 가장 좋은 프레임은 무엇일까요?

확실한 프레임인데 곧 주의 프레임이고 성경적 프레임입니다.

롬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세상과 죄된 프레임에서 벗어나 주의 프레임을 갖는 일이 기독신앙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만의 프레임으로 성경을 믿으려고 하여 실패합니다.

요셉은 애굽에 팔렸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고난 받은 욥도 그랬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고 이 믿음이 소망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그 프레임대로 되었습니다.

 

하나씩 진단해 봅시다.

죄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도덕적으로 혹은 법률적으로 그릇된 것을 죄라 정의합니다.

그러나 도덕은 시대와 국가에 따라 차이가 있고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동성혼금지는 위헌이라며 아시아국가에선 처음으로 대만이 새 판결을 내놓았습니다.

이 영향이 우리에게도 곧 닥칠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동성동본끼리 결혼금지 했었지만 지금은 문제가 되지 않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프레임으로는 동성애는 언제나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죄의 기준은 언제나 같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요, 하나님의 기준에 못 미치는 것이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일이고 그 결국은 둘째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상태입니다.

 

고난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고난은 고통이 동반되기에 모두가 거부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윤회설을 믿는 신앙에서는 고난은 자신의 업을 씻는 순화의 과정인 만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마치 PT체조가 체벌로 하면 고통이지만 운동으로 하면 체력단련인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가요?

잠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그래서 이 프레임을 아는 성도는 고난의 유익을 알기에 인내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어떤가요?

세상에서는 아주 두려운 마지막 가능성 입니다.

그래서 말이 있습니다. “개똥밭에 뒹굴어도 저승 보다 이승이 낫다.”

그러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 계시는데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쉼과 예비하신 천국을 입성하는 관문으로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계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

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성공은 어떤가요?

대체로 소유가 많거나 자리가 높거나 찬사를 받는 경우 성공이라고 합니다만 성경적 성공은 사랑이고 평강입니다.

잠15:17)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 사람

사람은 어떤가요? 이제는 자신을 보고 이웃을 봅시다.

어떤 존재인가요? 철학적, 사회적, 생물학적으로 다르고 내 기분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대량학살은 물론 자살과 못난이들에 대한 업신여김이 많은 곳이 유물론주의입니다.

이웃 큰 나라를 보면 걸인이 없는데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크고 인구가 많기에 더 많습니다만 수용소에 보내서 보이질 않을 뿐입니다.

또 평양에는 장애인이 살지 못하고 지방으로 추방된 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셔서 독생자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대속하케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창녀였던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거지 나사로, 수가성의 여인,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도 구원 받을 수 있

었습니다.

나아가 생명 있는 육축까지 소중하게 대합니다.

잠12:10)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선진문화일수록 사람이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약하고 가난하고 천시 받는 사람들이 함께 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이 그러셨고, 사도들이 그랬고, 성령님이 지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후의 낙원이나 천국만이 아닙니다.

어디든 구별은 있으나 차별이 없다면 낙원인 것입니다.

사11:6~8)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

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완전한 천국생활의 계시이지만 이 땅에서부터 그림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특징이 무엇인가요? 큰 자의 배려인데 천국의 대원리입니다.

 

3) 행복자와 행복

그렇다면 행복과 행복자는 어떨까요?

세상프레임으론 사회적 만족이나 성공자일 경우 행복하고 행복자라고 자타가 말합니다.

또는 불행하지 않는 모든 때가 행복이기에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자라고도 합니다.

과연 그런가요? 여기에 비하면 예수님은 물론 사도들과 초기의 성도들은 다 불행했고 불행자들인 셈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변변한 수입원도 없고 성공의 문턱도 못 간만큼 불행자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하나님은 오히려 행복자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이 돕는 방패시고, 영광의 칼이시기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행복할 수 있고 구원함을 얻었기에 행복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선포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자로써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의롭다하신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듯이,

행복자라 선포하신 이 역시 그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행복을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게 하듯 행복도 누리게 할 것입니다.

먼저 의롭다 칭하셨기에 우리가 의인으로 사는 것처럼 행복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자는 어떤가요? 징징거리지 않습니다.

행복자는 행복을 만들어 나갑니다.

행복한 곳으로 소문난 곳을 갔더니 모두가 웃음으로 반겨주더랍니다.

그래서 행복했고 또 가고 싶더랍니다.

불행한 곳으로 소문난 곳을 갔더니 모두가 울상이랍니다.

그래서 울상이 됐고 다시 가고 싶지 않더랍니다.

그러므로 행복자는 새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33:29)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웃으면 복이 들어온다.” 는 말을 들어보았나요? 사실입니다.

잘 웃기만 해도 복이 오는데 하물며 행복자의 행복은 더하지 않겠나요?

 

결론) 우리의 행복은 상황이나 조건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로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 자기도취나 암시를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합의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