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경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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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발리섬을 갔었습니다.
호텔을 비롯한 곳곳은 향내로 가득했고,
거리는 온통 돌상 투성이기에 아예 눈을 감고 다녔었습니다.
관광은 사원을 둘러보는 일인데 신발 벗고 가죽 띠는 빼야했기에 들어가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예복과 예물을 갖춰 자신들의 신을 극진히 섬기는 모습에서
성도의 믿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1) 자유
우리는 믿음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고 합니다.
자유는 소중한 권리이지만 지혜가 없으면 자칫 방종이나 이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참신이시오, 크신 신이고 살아계신 신이십니다.
그런 분께 나아가 큰절을 드린다는 경배자가 복장부터 자기 편리만 주장하고 마음은 자기중심이 충만하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흔히 경건의 모양 보다는 경건의 능력을 붙잡는다지만 이 경건의 능력 없이 경건의 모양도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닙
니다.
정말 능력이 있다면 모양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는 고운 모양이나 풍채는 없으셨지만 그 안에 하늘능력이 있었습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
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나 하는 일을 보아 나인 줄 알라” 하셨습니다.
종교는 언제나 능력이 없기에 모양을 앞세웁니다.
신상은 금칠하거나 크게 만들어 위용을 앞세웠고
아니면 눈을 부릅뜨거나 칼이나 창으로 위협적이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적 신앙은 능력과 권세가 실제이기에 모양이나 규례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꾸민 그 어떤 것이 없고, 아무런 곳도 상관하지 않으며,
심지어 아무런 때도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행동도 용납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아무런 행동마져 용납된다면 죽은 신앙이거나 헛것에 불과합니다.
전5:1) 너는 하나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
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 깨닫지 못함이니라
기독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아시나요?
기독교는 정식명칭이고 개신교는 약칭명칭입니다.
명함을 받았으면 명함대로 이름과 직위를 불러주어야 옳습니다.
사무총장과 총무와는 비슷해도 다르고 예용범과 예행범도 비슷해도 다르긴 마찬가지입니다.
유감된 것은 요즘은 개독이라는 비하로 불리는데 적극적 방어를 해야 합니다.
자유에는 방어의 책임도 있기 때문입니다.
2) 발을 삼가라
성도는 하나님을 뵙고, 모시고, 교제하는 거룩한 자이기에, 교회는 또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언제 발을 삼가는 모양으로 죄를 멀리하는 능력이 절대적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자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제물을 드리는 일 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카인과 아벨을 기억하시나요?
같은 형제였고 같은 하나님께 제사하며 제물을 드렸지만 반대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요?
카인과 카인의 제사는 거부하셨고 아벨과 그 제사는 열납하셨습니다.
이유는 카인은 죄가 엎드려져 있어서입니다.
곧 죄 있는 삶으로 제물과 제사를 드렸으니 하나님이 카인과 그 제사를 거부하셨던 것인데
이를 알고 되레 화를 내는 카인에게 하나님은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결국 카인은 동생 아벨을 쳐죽이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인지하며 사는 이들은 예배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해서 죄에서 죽은 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모습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을 드리는
것 보다 나으니”입니다.
우매자들은 제물로서 자기 죄에서 면책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순종밖에 없습니다.
순종을 잘하려면 성경을 많이 보아야 믿음도 생기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우리게 됩니다.
사람들이 휴대폰을 많이 사용하는 이유가 손 안에 있어서입니다.
그렇다면 말씀도 손 안에 있으면 좋습니다.
이들은 죄악을 알기에 죄악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말을 하지 않고 서원은 물론 저주도 축복도 신중하게 됩니다.
전5:6)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
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언제부터인가 우리 기독교가 가볍다 못해 천박스럽게까지 되었습니다.
짐작하면 1980년대의 시대발전과 함께 교회가 성장하면서 교인증가로 말과 허물이 많아진 탓이라 여겨집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근래 들어 젊은이들이 교회 다니는 일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가 되었으니 신뢰를 잃었습니다,
신뢰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오는 결과입니다.
여기서 사는 길은 다른데 없습니다.
전5:2)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
전5:3)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느니라
전5: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여기서 서원을 다시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약속한 한 것입니다.
한나 여인은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의 종으로 드린다고 서원했었고 그 기도대로 바친 아들이 사무엘선지자였습니다.
사람은 변덕스러운 존재이기에 화장실 갈 때와 올 때가 다릅니다.
긴급할수록 간절히 구하면서 서원을 한 후 형편이 달라지면 고의적이라도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가 약속한 것을 이루도록 기다리시
고 또 촉구도 하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사람은 궁하면 변하는 존재인 만큼 궁할수록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은혜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은 이렇듯 일을 계획하시며 성취하기도 하십니다.
여하한 서원은 해로울지라도 갚아야 됩니다.
여기에 변명은 의미가 없습니다.
3) 오직 하나님 경외
하나님경외는 오직 하나님방식으로 해야 인정받습니다.
이솝우화에는 서로 다른 동물이 서로 대접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우는 핱는 접시에 음식을 담아 학을 대접하니 학은 먹을 수 없었고,
학은 호리병에 음식을 담아 여우를 대접하니 먹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경외를 인간적이거나 종교적으로 찾고는 하나님경외라고 한다면 아닙니다.
하나님식이어야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됩니다.
하나님경외는 말이나 모양이 아닌 능력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로써 발을 삼가는,,
곧 죄를 등지는 하나님을 감찰자로 인정하는 삶입니다.
전5:8)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한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
결론)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만큼 하나님은 내게 소산이 되어주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은 일은 없어야 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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