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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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사람이 생각하는 최상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입니다.
그러나 이상적 사회만이 아닌 실제는 사랑으로 품었던 어머니 뱃속과 부모형제와 함께했던 가정이 유토피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도 못합니다.
폭력이 심각한 탓에 유토피아는 더 멀게 되었습니다.
1) 사람
사람을 보십시오.
구조적으로 본다면 마디마디의 관절과 열손가락이 활동적이고, 지능적으로 보면 탁월하여 만물의영장이며, 사회적으로 보
면 사람중심의 세상을 만들어 지구는 물론 달과 같은 신세계까지 개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의 보이지 않는 죄성으로 사람부터 세상을 온통 망가트려놨습니다.
인터넷을 처음 만들던 사람은 인터넷으로 세계를 소통시키겠다고 장담했지만 결국 온갖 악의 오염수를 소통시켰고, 정치
인들이 주창했던 자유와 인권은 소중한 기본권리지만 이기심과 갈등을 부추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럴 듯한 수많은 세계 무슨무슨위원회가 회의를 하고 대책을 간구했어도,,
환경파괴와 인권을 말살하는 독재주의는 여전히 악성 암 덩어리처럼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코로나라는 거대 재난에서 세계가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사람사이의 유대와 협력인데 곧 신뢰와 사랑입니다.
부모형제도, 이웃도 신뢰와 사랑이 있으면 곤경을 헤치고 나올 수 있지만 반대적인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면 주저 않게 됩
니다.
염려되는 일이 바로 그거입니다.
살기 어렵다하여 사나워졌고, 우리나라는 마침 선거철이 되었기에 상대에 대한 공격이 많아졌기에 남는 것은 상처뿐이므
로 조심해야 합니다.
‘깐깐함’이란 말을 좋아하나요?
깐깐함이란 괜한 귀찮게함이나 소모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이고 진실적인 분명함을 의미한다면 어떤가요? 다릅니다,
내가 제품에 대해서 깐깐하면 제품 만드는 이도 깐깐해져서 제품은 자연 좋게 됩니다.
정치인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정치인의 웅변과 술수 보다는 인품과 정책을 신뢰해야 하며 그런 사회를 존중하는 일이 사회적 사랑이고 유토피아 건설입
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전이나 말이나 모이는 숫자나 건물의 위용이 아니라 인품과 삶을 보는 깐깐함이 필요합니다.
무조건적인 “대깨” 이면 실제는 진영과 내로남불이 득세하여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이고 반 미래적이 됩니다.
금번 서울에는 노동자회원들의 시위가 있었고 대구에는 어느 가수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상식을 떠난 행동들이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 속에 성도는 없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2) 성도
언제어디서나 성도의 역할이 있습니다.
9~11절) 빛 가운데 있다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
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빛은 밝히는 속성이기에 죄, 거짓, 불의는 미워합니다.
그러나 빛은 원수에게도 불쌍히 여기며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빛이 없으면 질서가 없어 혼란이 다반사이기에 공의가 없고 사랑도 없어 골 깊은 후유증과 상처만 남깁니다.
상처 나는데 바르는 약이 있듯이 성도는 그 역할을 자처해야 합니다.
서로 돕고 보살피는 마음이 작용하고 그런 면이 사회적 시스템으로 자리 잡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똑똑함이나 우월함이 아니고 사랑이며 지적이나 가르침이 아닙니다.
곁에 있음과 덮어줌과 본을 보임이어야 합니다.
이 설교를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구글의 한 여성수석디자이너가 자기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성도 같았습니다.
구글이라는 회사가 자유롭지만 성과를 중시한답니다.
그녀는 팀원들에게서 평가를 받는데 그 평가를 받은 후 자존감이 무너졌답니다.
회사가 두려워 화장실과 차 안에서 있게 되었고,, 마침내 회사의 상담가에게 상담을 받았는데 스스로를 닦달하지 말고 사
랑하라는 조언을 들었답니다.
그런 조언을 새겨 다가오는 평가일에 맞추어 부서 직원 전체에게 메일을 보냈답니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이다
우물 밖의 개구리가 되려하지 말고 우물 안에서의 행복한 개구리가 되자,,“ 했더니 모두의 공감이 일어났답니다.
모두가 말들은 안 했지만 다 같은 상태였고 민족성은 달랐지만 같은 마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흔히 뒤늦게 후회하는 일 가운데 부모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내 엄마는 강한 엄마였기에 멋도 맛도 모르는 씩씩한 여성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다가 어느 날 실제는 엄마가 엄마를 그리
워하고 멋도 맛도 아는 여린 존재라는 진실을 알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역시도 언제나 듬직한 산일 거라는 믿음에서 벗어나 두려움이 많은 나약한 존재임을 뒤늦게 깨닫고는 고인이어도
죄송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사람은 사람이해라는 지식이 필요한데 철없으면 부모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편견을 지우고 참 사람을 보여줍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위 말씀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계시하고 있습니다.
또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
자니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람은 머리 모양, 외모, 성향, 기질이 좀 달라도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하나님 사랑을 받았고 줄 수 있는 존재이기에 빛의 역할이 주어진 것입니다.
3) 사회적 유토피아
하나님 나라를 아시나요?
예수님의 사랑이 실현되는 진정한 사회적 유토피아입니다.
미래적이지만 이미 와 있는 유토피아이기도 합니다,.
사11:6~8)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
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강조되는 단어가 있는데 “함께”,,
여기에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부 조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어린 사자, 어린 아이와 암소와 곰이,,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
을,,
어울릴 수 있는 너와 내가 원수 짓는 일과 얼마나 다른지요?
형제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일과 얼마나 다른지요?
사랑해서 결혼하고 행복하자고 맹세했던 부부가 무섭게 저주하고 이혼하는 일과는 얼마나 다른지요?
사회적 유토피아는 정치나 이념이나 제도가 아닌 나부터의 사랑실천입니다.
“너부터 사랑” 에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옥이 있을 뿐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에서는 이리가 먼저 사랑한 것이고, 표범과 어린 염소에서는 표범이었습니다.
강자이고 큰 자가 먼저였습니다.
앞으로 세상에는 재난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재난은 낡은 질서를 고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로를 구조하고 보살피는 사회적 유토피아를 경험하게 하도록
빛에 머무는 빛의 사람들과 그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떡이 중요해서 떡 때문에 아우성이지만 떡이 전체가 아닙니다.
사랑이 있어야 감동을 받고 희망을 봅니다,.
법이 질서를 세우는 듯해도 법이 모든 일을 세울 수 없습니다.
사랑만이 자율과 자원을 이룩합니다.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나 공산국가에도 부자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린 양에게 기부하지 못한 이유는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빛이 없어서입니다.
이리가 이리로 표범이 표범으로 독사가 독사로 사는 일은 생긴 그대로입니다.
변화되고 거듭날 때 이리지만 어린양처럼 되고 표범이 어린 염소 같이 됩니다.
결론) 빛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그 사랑의 증거가 예수님이라는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진실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어도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아주 없도다.” 하셨는데
이 사랑에 감읍하는 것이 기독신앙이고 이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기독인의 성숙 혹은 성화입니다.
빛이란 빛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기 보다는 드러냄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의로움과 진실함과 거룩함에 있음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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