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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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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1-11-07 07:34 조회 30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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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모든 문학의 형태가 다 들어 있어도 묵상집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묵상집,,사도들의 묵상집,,왜 없을까요? 묵상 보다는 행동이 많아서입니다.

 

1) 예수님과 사도들

예수님을 보면 공생애시작부터 행동적이었습니다.

마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하시니

예수님은 세례가 무엇일까? 왜 요단강이고 왜 세례요한인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 광야의 시험인데 역시 관념적이지 않으셨습니다.

마4:1~2)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그리고 생애마지막 말씀은 누구처럼 “인생은 공이다”가 아닌 “다 이루었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생각보다는 성령을 따르셨고 망설임 없이 행동하셨으니 곧 순종이었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 본받고 명령받은 대로 순종하여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그 움직임의 기록이 사도행전입니다.

수도 예루살렘부터 시작된 사도들의 믿음 행동이 유다 지방과 좀 더 먼 사마리아지역과 아주 먼 곳인 땅 끝까지 이르렀고

지금은 믿음의 후대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도들도 성령의 지시를 따라 행동한 것이지 다수결의나 상항을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일에 생각하고, 회의하고, 예산 따라 움직이는 현대와 많은 차이가 납니다.

신중도,, 생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매이면 돌다리도 못 건너고 기적은 꿈에도 없습니다.

유감되게 현대의 기독신앙은 기업처럼 생각과 말과 예산에만 있어,, 예산 없으면 아예 포기부터하고, 포럼과 세미나가 많

고,, 교회들도 구호와 표어를 앞세우고 있습니다.

이는 반대로 성령을 구하거나 행동이 없는 또 다른 모습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자리를 들고 일어나기보다는 앉은 그대로 뭉게는 모습인데,,

성장도, 성숙도 없는,, 활동이 없고 온기도 없는 공동묘지 모습입니다.

공동묘지에 무덤이 느는 것을 부흥이라 할 수 없듯이,,

행동하지 않은 교회나 교인들이 느는 것이 부흥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런 성도들이 그러한 교회를 만들었고 그러한 교회들이 그러한 시대를 만들었고,,

아니면 그런 목사들이 그런 성도와 교회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하셨고,,

세간에서는 “정치는 말의 예술이니,,” 했으니,, 성도는 행동적이어야 합니다.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

기를 구원하겠느냐

 

2) 믿음의 감별

진짜냐 가짜냐를 감별하는 데는 사물마다 다릅니다.

모양이나, 질이나, 색이나, 냄새로도 감별됩니다.

기독신앙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태도로 결정됩니다.

사람은 차별이 없어,, 갇힌 자를 동정하고, 과부와 고아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않습니다.

잠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

를 공경하는 자니라

 

이는 신념적이고 훈련적인 것이 아니라 천성적인 것이기에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선언이 맞습니다.

 

마귀도 하나님은 한분으로 믿고 떱니다.

그러나 마귀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순종하지 않기에 지식은 있을지언정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남도,,자신도 구원

하지 못합니다.

참 믿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대다수의 믿음은 이처럼 자기 지식에 의한 자기 신념에 불과합니다.

로마서는 이런 모습을 좀 더 사실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

련한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러므로 진짜 참 믿음은 내안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만큼 하나님께 경배가 있고, 순종이 있고, 나아가 사

람과 삶에 모든 의로움과 진실함과 거룩함이 있습니다.

다만 믿음이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그러나 결은 언제나 같습니다,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본토를 떠나라하셨던 하나님을 믿었기에,, 생각하고 말로만 “떠나야지 떠나야지” 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떠났기 때문입

니다.

그 많은 나이에 본토친척 땅을 떠나 알 수 없는,,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이 아니라 지시하실 땅으로 나갔던 것이 하나님을 인

정한 믿음이었습니다.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다 그랬습니다.

믿음은 행동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증명합니다.

본문의 라합 여인도 그랬습니다.

가나안 땅을 살피러 왔던 이스라엘정찰대원들을 숨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저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을 정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였습니다.

히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

도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은 무엇인가요?

세상을 평화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은 어디서 오나요?

체벌이나 고문이나 투쟁이나 전쟁이나 웅변이나 감격이 아니라 감동입니다.

가슴을 적시는 글이나 그림이나 기도나 행동이,,작아도 영향력이 있는 만큼 변화를 만듭니다.

 

3) 능력

우리의 믿음도 그렇습니다,.

진짜일수록 하나님께 온 능력이고, 주님 닮은 순종이고 실천이어서 감동을 줍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 하셨습니다.

능력 그러면,, 귀신을 물리치고 새 방언을 말하고 병든 자에게 손을 얹으면 낫는 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 모습 말고 또 다

른 면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대표적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어떻게 할까요?

기도해줄까요? 나중에 오라 할까요?

약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주님은 강도 만난 자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살펴보면 강도만난 사람은 거반 죽게 되었는데 구조하는 사람은 아무런 조건이나 질문이 없이 그냥 구조했던 것

입니다.

앞서 지나쳤던 종교인들과 얼마나 다른지요.

 

만약 “왜 강도 만났느냐? 생각해 보아라,,” “어떻게 나을까 깨달아라”

“치료 받고 싶으면 공을 들여라” 했다면 종교이고,,

“병원에 데려다 주면 얼마 줄래”했다면 사업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유와 인종을 따지지 않고 자기 짐승에 태워 치료 받게 하고 치료비가 더 들면 또 비용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요?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만이” 아닌 주변의 모두입니다.

또 그들에게 이웃이 되는 관계는 다른 관계가 아니라 “너희도 그와 같이 하라”하셨듯이,,

내가 먼저 손잡아 주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생각만 하고 말만 앞세우며 실천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입니다.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죽은 사람은 피부에 여드름도 안 나고 미동도 없습니다.

온기도 없고 불쾌한 냄새만 납니다.

죽은 신앙은 애당초 신앙일 수 없습니다.

결론) 동물 중에 사회성이 높은 동물들은 자기네들 중에서 약한 동물을 돕습니다.

코끼리는 구렁텅이에 빠진 새끼를 무리가 건져냈었고 돌고래는 숨쉬지 못하는 새끼를 등으로 밀어 올렸으니 협력이고 협

동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는 이 모습이 있고 성도에게는 넘쳐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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