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제일교회
홈로그인
HOME · 설교&칼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설교말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5-03-29 14:01 조회 1,145회 댓글 0건

본문

지금은 사순절 기간이고 다음 주간에는 수난주간, 오는 금요일은 주님이 못 박혀 돌아가신 성금요일입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 주 안의 신앙

미국뉴욕의 카톨릭 신부가 사순절기간에 거리탐방을 나갔다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소문으로 듣던 노상강도도 마침내 만났습니다.

강도는 돈을 요구했지만 신부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주머니에 피우던 담배가 있기에 강도에게 담배를 권했더니 강도는 희한한 말을 했습니다.

“사순절에 신부님이 담배를 피웁니까? 강도인 나도 이때만큼은 금연하고 있습니다.”

강도의 신앙은 대단한 듯해도 잘못입니다.

금연 보다 강도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신앙을 가리켜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거르는 도다” 하시며 겉치레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사순절이기에 특별나고, 수난주간이기에 특별나야 한다? 좋습니다.

그러나 심보를 옳게 가져야 합니다.

주 안의 신앙은 이날을 저 날 보다 특별히 여기지 않습니다만,

이는 겉만 꾸미는 신앙이 아니라 속부터 단장된 신앙이기에 날마다 시간마다 의미 있고 경건하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니 불교는 오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북한 불교연맹과 공동으로 법회를 갖기로 했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북한은 물론 남한에서조차 부활절예배에도 파가 갈리워져 두 파로 예배한 답니다. 그러면서 각 총회마다 총회장이 부활절메시지를 발표했는데, 대체로 일치와 화합을 이루자고 했으니 개가 짖다가 웃을 일입니다.

 

주 안의 신앙은 말의 향연이 아닙니다.

행동이고 행위인데, 언제나 동일해야 합니다. 한 입 갖고 다른 두 말을 하는 것은 정치입니다.

이타적 행동, 경건한 행위, 자연스런 맛과 빛으로 나타나야 주와 동행하는 신앙입니다.

 

저는 행신동의 통증 크리닉을 다니는데, 이곳은 의사 3명이 다 크리스챤입니다.

이들은 점심시간에 모여 큐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곳 직원들은 다 친절합니다.

그 비결은 의사들이 직원들을 잘 대우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카운터에 2명이 있다가 3명이 되었습니다.

이유인즉 둘 중에 누군가 반 휴가를 쓰면 나머지 한 사람이 힘들고, 힘들면 오는 환자들에게 불친절할 듯해서 한명을 더 고용한 것인데, 의사들이 자기들의 떡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이게 직원들의 복지입니다. 이들을 향한 배려가 신앙인 것입니다. 이 삶이 전도지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교회당에서는 훌륭한 신앙인데 집에서, 직장에서, 혹은 자신의 종업원들에게서 흉잡힌 것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의사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이 내가 멀어도 그곳으로 가는 이유인데, 그제는 카운터 직원들에게 커피를 주문해주고 왔습니다. 점심식사 후에 먹으라고,

 

사순절인 지금 어떠했나요? 금번 수난 주간에는 어떠할까요? 성금요일에는? 단정한 옷차림에 오락과 유흥을 절제하시겠나요? 그렇다면 평상시에는 어떠했나요?

언제나 우리는 주안에서 주와 동행해야함을 명심하십시오. 빛과 동행하는 일입니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2) 주의 수난

주께서 왜 세상에 오셨으며 왜 수난을 당했나요? 왜 죽으심을 당해셨나요?

이사야 선지자는 명확하게 선포했습니다.

사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죄악을 해결하고, 죄인을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혜로신 방식입니다.

죄를 그냥 면책하지 않으셨습니다. 심판하셨습니다.

죄인을 그냥 의롭다고 선언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으로 죽고 다시 살리셔서 주의 의로 포장하셨습니다.

이 또한 말의 향연이 아닌 실제였습니다.

 

이 방식은 아담 때부터 세레 요한까지 진행되어 온 하나님의 죄 해결법이고 죄인이 의인되는 유일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더 완전한 제사를 통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레위제사장이 아닌 주님이 제사장으로써, 성막이 아닌 자신을 몸을 성전 삼으시고,

양이나 소가 아닌 흠없는 자신의 몸을 제물삼아, 자신의 피로 단번의 속죄를 드려, 믿는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제사장이나 성전이나 제물이 필요한 제사가 필요 없습니다.

주님의 피는 완전하고 제사도 완전하여 구원은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히10:18~20)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 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저희 육체니라

 

주님 운명하시던 때,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기어진 것이 이 의미입니다.

마27:50~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그러므로 이 피를 믿는 자는 누구나 언제든지 하나님께 담대히 당당히 나아감을 얻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의 프레프레스노라는 도시에 베느스텔 노인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도였고 주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분들이었습니다.

하루는 병원응급실에서 응급수술환자 때문에 부인의 피가 필요하다며 수혈요청전화가 왔습니다. 병원에 등록된 특수 혈액자에 부인이 등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에 병원으로 달려가 누군가를 위해 헌혈을 하는데 남편은 상대방이 궁금해져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응급환자는 그 날, 그 어머니날에 어머니 앞에서 형제와 싸우다 다친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은, 수혈자가 의인이 아니라서 불쾌했고 아내의 피가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에게 감동을 주시기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실 때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예수의 보혈이 네 죄를 씻은 것은 네가 자격이 있어서냐?”하셨습니다.

그 남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 청년의 생명을 건져주소서 그리고 그의 죄를 주의 피로 다 씻으시고 영혼까지 구원하소서”

 

3) 수난신앙

수난주간이 되면 너무 감정적으로 치우쳐서 “우리 주님 얼마나 아프셨을까?”를 헤아리곤 합니다만, 진정한 수난 신앙은 이런 생각만이 아니라 나아가 죄에서 죽고 또 죽고, 의에서 살고 또 사는 부활로 이어진 생활입니다.

 

일제 만행에 의한 위안부할머니들을 생각해서 소녀상을 만들었습니다.

더러는 위안부할머니들을 위한답시고 그 소녀상에게 목도리와 우산을 받쳐주곤 합니다.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그것보다 강한 대한민국 국력을 주문할 것입니다.

위안부소녀상을 보셨나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앉아있는 모습은 소녀인데 그림자는 등이 굽은 할머니입니다. 늙도록 한이 서린 그림자입니다.

꼭 쥔 두 손은 무례한 일본에 대한 분노입니다.

까치발은 고향에 돌아가서도 편히 안착하지 못한 비극적 삶입니다.

어깨위의 작은 새는 산사람과 돌아가신 사람 간의 연결이고, 곁의 빈의자는 세상을 이미 뜬 할머니들의 자리이고 바로 오늘을 사는 나의 자리입니다.

 

주님은 나를, 하나님께 인도하시고자 십자가위에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 죄의 심판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했습니다. 아들이 아닌 죄인의 괴수였기에 하나님은 그를 무참하게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위에는 은혜가 없었습니다. 죄는 언제나 하나님께 철저히 외면 받습니다.

 

이때, 주님은 하늘과 땅에서 철저히 왕따 당했습니다. 괴로움의 극치입니다.

그럼에도 간절히 붙잡은 것 하나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주님이 다시 산 일체의 비결입니다.

 

우리의 삶도 여하한의 수난주간입니다. 때론 삶이 힘들어 극단의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나의하나님, 나의 하나님,”하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40주야의 큰 홍수로 세상이 다 망가졌습니다.

나이도 많이 먹고 가진 것은 동물뿐입니다. 이웃도 없고 할 일은 태산입니다.

누구의 얘기인가요? 노아입니다.

얼마나 좌절했을까요? 세상으로 부터 왕따를 받으며 방주를 만들었는데,

그 고생을 마치자마자 더 나은 세상이 시작된 줄 알았는데, 황폐해졌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떨까요? 한 번 그 지경에 서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달랐습니다.

창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느낌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듯 한일이 많습니다.

주님도 그랬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실제는 아니었습니다.

 

결론) 수난주간을 느낌으로 살지 맙시다.

오히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며 그 하나님을 기뻐하며 나갑시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죄는 죽이고 의는 살도록, 삶의 정결함을 올립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