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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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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5-05-31 11:01 조회 94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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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 어느 중년여성이 몸이 아파 병원에 갈려고 머리에 물을 뿌리는 순간, 그 첫 방울이 닿는 그때에 뒷골이 확 땡겼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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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애기인가요? 아팠다는 의미도 있지만, 여성은 몸이 아파 병원엘 가도 준비할게 많다는 말도 됩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배하러 오면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했나요?

 

1)준비를 하는 신앙

시장과 공동묘지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역동성입니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호기심입니다.

살아있는 신앙과 죽은 신앙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생각이 있느냐? 준비가 있느냐? 입니다.

우리 신앙의 특성은 주가 내게 맞추는 신앙이 아니라 내가 주께 맞추는 신앙이기에,

생각이 있고 준비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주인공은 “6절,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를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타고 갈까? 가 아닌, 어떻게 경배할까? 였습니다.

부흥의 모습입니다.

 

극동방송사에서는 현재 ‘예배회복’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사람 중심의 예배가 만연했다고 여겨, 하나님 중심의 예배로 되돌리는 신앙회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비결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잠22:28)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찌니라

 

비슷한 예로 이삭은 우물을 팔 때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새로운 우물을 파기 보다 아버지가 팠던 옛 우물에서 물 나올 확률이 컸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부흥의 시대를 본받아야 합니다.

행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 하더라 를 참고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역사서입니다.

교회 부흥의 백서이기에 신앙의 모본은 여기서 찾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신앙, 우리의 경우 일제와 공산당과 맞섰던 신앙이 우리의 지계석이고 옛 우물입니다.

그럼에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진리이기에 바뀌지 않지만, 복음을 담는 그릇은 시대 따라 다를 수 있다며, 예배를 손대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거부하고 싫은 것은 중생되지 않은 심성의 탓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재미가 없어서 그렇다며 예배를 중생되지 않은 심성에 맞추어 재미나게 꾸몄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 사람들이 중생되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왕성할 줄 알았는데 교회가 죽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회는 사람이 떠나가고 등, 급기야는 지금처럼 예배회복운동이 생기기까지 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계시에 의한 요소로 채워져야 합니다.

묵도, 신앙고백, 시와 찬미, 설교, 봉헌, 그리고 축도 등,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중심의 흥미중심으로 채워지니 공연이 되어 버립니다.

 

교회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학교는 성경학교입니다. 여기의 커리큐럼의 주제는 언제나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중생하지 않으면 재미없는 바는 당연합니다.

그런데 역시, 사람 끌어들인다는 명분으로 성경배우기를 빼고 오직 재미나게만 구성했다가 지금 모양의 교회학교가 되었습니다.

 

예배요소를 누가 임의로 조정하나요? 할 수 없습니다.

교회학교의 목적을 어디서 재미나게로 바꿀 수 있나요? 그럴 수 없습니다.

딤전1:3~5) ~ 내가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교회 교육의 목적입니다.

만약 재미난 것을 교육하고자했다면 바울사도는 디모데를 그곳에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디모데는 어떻게 교육 받았나요? 어려서부터 외조모와 어머니로 부터 배우고 익혔습니다.

 

중생의 사람은 언제나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위엣 것을 찾기에 땅의 일을 찾는 속물속성과 다릅니다.

그 첫째가 하나님의 영광이고 기쁨이기에, “6절,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 할까”를, 우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감을 생각하니 자기 영혼과 죄가 드러나 또 살피게 됩니다. “ 7절,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2)보여주신 대로

요즘 먹방이 대세입니다.

인기 좋은 백 쉐프는 좋은 요리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따라하다가 본래의 맛과 모양이 안 나온다고 푸념을 하니, 계량컵을 사용했습니다.

확실한 계시인 것입니다.

어디든 매뉴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성도에게 매뉴얼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식 매뉴얼입니다.

“8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나아가 예수님의 삶으로 실제를 교훈하셨고, 성경으로 언제든지 항상 교훈하시며, 성령님으로

이 계시의 삶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자기식이나 주먹구구식이나 옛 신앙 방식으로 주를 섬깁니다.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출애굽 시켜준 구원의 하나님으로 경배한 것과 같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기뻐하심 보다 격노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옛 방식에서 벗어남이 있었습니다.

‘회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식을, 하나님 방식으로 받아드림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며 세례 받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하나님과 함께 평생 동행 하는 일이 있는데 ‘겸손’입니다.

겸손은 성품적이기도 하지만 신앙에서는 ‘행위적’인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말구유의 아기 예수께 찾아와 경배했음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이 행위적 겸손을 우리에게 보이셨고 주문하십니다.

얼마나 종교적이고 얼마나 열심이냐 보다 행위를 보십니다.

삼상2:3)~ 여호와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실제 들어난 행동만이 아니라 중심부터 살피십니다.

 

요즘 취직하기가 얼마나 어렵나요?

그런데 힘 있는 사람이 도움을 주겠다면 어떨까요?

그런데 그 손길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그 사람과 인연이 닿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니겠지요, 하나님께 약속한 것도 있으니 하나님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

 

이 믿음 귀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만큼 약속 있는 내용이 있는데 행위적 겸손입니다.

 

지진을 당한 네팔은 신의 국가랍니다.

금번에 숱한 사원들이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힌두를 믿는데, 많은 신을 섬기는 그들입니다.

그들은 정성을 다해 그신들을 섬깁니다.

집마다 동네마다 직장마다 사원을 짓고 외출하고 돌아올 때마다 그 사원을 돌고 경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며, 그 믿음 안에서 겸손한 행위인 것입니다.

 

3)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겸손

첫째, 오직 공의를 행하며

억만금을 헌금해도 공의롭지 못한 헌금이라면 하나님께는 의미 없습니다.

김 영삼 대통령 정권말기에 그의 아들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12억을 한 공동체에 기부하고자 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공의는 정의와 다릅니다.

정의는 일반적입니다. 시대와 지역과 신앙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안을 두고 동양과 서양이 다르지 않나요? 문화와 전통이 다른 만큼 법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의는 언제나 진리이신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동성애, 지난 26일 서울광장에서 행사가 있었다지만, 세계 21국이 이미 찬성하고 자신들이 정의가 수정되었다 해도, 하나님의 공의에는 여전히 벗어나 있기에 언제나 배격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미국 성공회가 몇 년 전 허락하더니 작년에는 그 미국의 장로교회도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공의에는 간과하기 쉬운 “오직‘이 앞섬을 유념해야 합니다.

 

둘째, 인자를 사랑하며

작은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사람의 가치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특히 장애우, 노약자, 가난한자 등, 꼭 어는 특정 부류가 아닌 뭇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겁나하더니, 싫어지더니 급기야는 이웃도 없어지고 점차로 부모형제도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미7:2) 이와 같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그러면서 오직 자기 사랑은 유별 나 졌고, 애완견이 반려견으로 올랐으며 돈 사랑은 대단해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시대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과 인자는 언제나 =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물 부족 국가입니다.

물 사 먹잖나요? 이유는 과거에 물을 흥청망청 썼기에 그 댓가를 지불하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지금부터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곧 내가 천하게 됩니다.

 

이런 시대는 ‘인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배척합니다.

 

결론) 독생자를 주셨던 하나님은, 인자된 나를 귀하게 보신 하나님 이십니다.

지금도 이러한 계시의 매뉴얼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인자인 내가 귀한 까닭입니다.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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