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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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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5-08-09 18:40 조회 98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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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는 이들 조차 익숙한 성경구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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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문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익숙하다는 것은 많이 사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착각이 있습니다.

성도나 교회의 말이 아닌 주의 말씀입니다.

교회나 성도는 이럴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성구가 붙어 있는 교회나, 이 말씀을 인용한 성도를 신뢰하면 낭패를 겪습니다.

 

다른 하나는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을 생략하여 과대 선전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의 3:16의 경우 “믿는 자”요,

본문에는 나중구절인 “내게 배우라”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 쉼이 없는 존재

요즘 잠 못 자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근대에서 1950년 이었습니다. 해방이후 삶의 안전기지가 파괴 된 때인 만큼, 노이로제 상담소가 처음 운영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더위 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생각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롯데가의 사람들은 잠실 롯데126층을 짓는 노동자들 보다 잠을 못잘 것입니다.

생각이 많아서,

 

서울 역 노숙자를 보다 쉼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큰 책임을 진, 염려 많은 사람들입니다.

전5: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잠 못 자는 불행은, 병적 불행이 아니라 쉼이 없는 불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후에 “생각하라”, “일하라” 가 아닌 “쉬어라” 였습니다.

머리가 있어 이성적 존재여도, 관절이 있어 노동의 존재여도, 앞서는 것은 영적 존재이기에

영혼부터 쉬어라입니다.

창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 하셨음이라

 

하나님이 피곤하셨기에 안식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창조주와 안식일의 제정자로써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하와는 여섯째 날에 창조된 후 첫 임무가 하나님과 안식이었습니다.

이 역시 시조로써 첫 순종인 것입니다.

 

세상은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는 분께서는 쉼을 중요시 여기신 것입니다.

 

노는 것과 쉬는 것은 다릅니다.

노는 것은 육체만 위한 반면 쉼은 영혼까지 위합니다.

성도는 노는 것은 지양해도 쉼은 지향해야 합니다.

 

이런 존재가 왜 쉼이 없을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탓인데, 저변의 이유는 “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하신, 주님의 반대된 성향과 생활 탓입니다.

이것을 타락이라 합니다.

 

온유의 반대가 무엇인가요? 온유가 무엇인가요? 때와 방법을 아는 지혜입니다.

불의 앞에 항거하고 약자를 보듬은, 바른 체세입니다.

 

죄는 이 온유를 강탈했기에 불의적이고 약자가 아닌 강자 중심의 처신을 이룹니다.

따라서 겸손할 수 없기에 쉼이 없습니다.

죄 많은 곳에는 다툼이 않은 곳이 되고 쉼이 없는 이치입니다.

“욕망의 논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결립의 논리입니다. ~

이를 테면 우리는 욕망을 늘 채워지지 않는 상태, 불만족의 상태에서 느낍니다.“ -릭, 페리-

 

2) 배우라

여기서 벗어나려면 어찌 해야 되나요?

우리들의 멍에를 벗고 주의 멍에를 메야 합니다.

주의 멍에는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특징이 있습니다.

 

전투복은 무엇인가요? 전투에 요긴한 옷입니다.

활동과 위장에 좋습니다.

작업복은 어떤가요?

작업에 용이함과 안전함을 줍니다.

방진복은 어떤가요? 방사능에서 지켜 줍니다.

 

주의 멍에는, 옷으로 간주하면 쉼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로 말미암는, 물질 중심과 육체 중심과 내 중심의 옷을 벗고 새로이 입어야 되는데 그 작업이 “배우라”입니다.

 

배움은 언제나 시행착오가 있습니다.

배움에는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나 배워서 익숙하고 습관되고 생활되면 참 편리합니다.

 

주께 배우는 온유와 겸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몸에 맞질 않습니다.

스스로 어색하다 여겨집니다.

그러나 세월 속에 익혀야 합니다.

성도가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재하는 이유는 이 온유와 겸손을 익혀라 하심입니다.

 

죄는 침노할 것과 포기할 것을 뒤바꾸어 버렸습니다.

천국은 침노해야 합니다. 주의 멍에는 적극적으로 메야 합니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주와 분리되게 하는 염려의 요소들, 삶의 괜한 집착들, 열심들을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한동안 우리 교계에선 ‘내려놓음’이 유행이었습니다.

그 2탄으론 ‘더 내려 놓음’도 있었습니다.

불교에선 ‘무소유’가 그리고 “천천히 살기‘가 유행이었습니다.

 

종교를 떠나서 특징이 무엇인가요? 마음의 쉼을 얻는 방식입니다.

다만 성경은 ‘주의 말씀을’ 교훈하고. 불교는 수도승의 깨우침으로 교훈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떤가요? 좋은 글이다, 내용이다 하여도 실행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더 붙들기’ 나 ‘더 오르기’ 류가, 대세이기에 사람들 마음에는 화가 있고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연속된 시대입니다.

 

3)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몸은 보신과 보석으로 단장하면 눈에 띄이고 거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몸보다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하고 ,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여 모든 악이 여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성추행에 관한 뉴스를 보십시오.

지식인, 종교인을 따지지 않습니다.

부패사건을 보십시오.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보혈은 우리를 전인격으로 살리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는 믿음에서 주의 멍에를 메고 주께로 부터 배워야 합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사도들과 믿음의 성도들은 세상 것으로 마음을 채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우고 주와 천국 것으로 충만케 했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천국은 모든 것이 풍성한 하늘 곳간의 상징입니다.

그곳을 얻는 비결은 마음을 비우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지극히 상식 아닌가요?

 

탐욕과 세상자랑과 이생의 사랑 보다는 그 마음에 주의 온유와 겸손으로 채워 가면

주를 담고자하는 애통이 있을 것이고, 사람에 대한 긍휼이 배어 날 것이고, 의를 추구할 것입니다.

 

결론) 믿노라하면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면, 회의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재점검과 재정비를 이루어야 합니다.

주 안의 성도들은 우울한 빛은 없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면에서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또한 “정과 욕심을 그 육체와 함께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노라”했습니다.

적극적인 주의 멍에를 배움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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