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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인의 칸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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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6-12-18 19:47 조회 670회 댓글 0건

본문

예수님의 탄생은 먼저 두 여인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늙도록 임산의 조짐이 없었기에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라는 아들을 얻게 되었으니, 그 기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어떨까요? 평범한 아들이 아니었으니 역시 큰 기쁨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러한 기쁨을 갖고 엘리사벳을 찾았습니다.

눅1:39~40)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1) 성령의 충만함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들을 때 6개월 된 요한이 복중에서 뛰놀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갓 임신한 마리아가 들어온 것은, 그 복중의 주가 오신 일이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도 성령 충만함으로 이를 고백했습니다.

눅1:43)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

 

친구목사님이 편찮으신 사촌형을 모시고 병원으로 갔는데 그 형은 그 교회의 교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목사님” 하며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엘리사벳이 친족이었기에 어른이겠으나 성령충만함은 복중의 아이가 조카가 아닌 주님이시오,

마리아는 손아래 여인이 아닌 주의 모친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령 충만함을 따라 마리아를 축복하였습니다.

눅1:45)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성령은 언제나 하나님과 주를 영화롭게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주를 주되게 하며, 훗날 주의 부활승천 후에는 주의 보내심을따라 세상에 오셔서 주를 영화

롭게 하며 믿는 자들의 구원의 보증이 되시고 보혜사가 되십니다.

 

이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나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없으며, 이 성령이 아니고서는 주의 구원의 선물을 누릴 수 없습

니다.

우리의 신앙은 구원이 시작이지만 완성이기에 성령이 절대적입니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미완이 됩니다.

성령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이단의 특징은 이 성령을 잘못 받은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래서 주를 부정한 체 특정인을 믿고, 혹은 주를 믿어도 고난 없는 번영신앙으로 빠집니다.

번영신앙이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 없는, 영광을 바라는 그 신앙 자태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거야 말로 인본주의입니다.


친구목사님은 목사가 되기 전 돈을 많이 벌었답니다.

그래서 전도하기를 "예수믿으면  부자된다" 며 전도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와 교회를 시작했답니다.

그러나 얼마후 동역하시던 목사님이 교회재산을 갖고 사라지는 바람에 자신의 전도가 잘못된 복음임을 알았답니다.

그후 신학을 마치고 진정한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면서 진리의복음을 전한다 했습니다.


2) 마리아의 찬양

엘리사벳의 축복에 마리아는 주를 찬양하였습니다.

눅1:46~47)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마리아의 마음과 입술을 주장한 힘은 무엇인가요?

눅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엘리사벳를 충만케 했던 그 성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찬송의 대상이 주였고, 그녀의 마음은 태어날 복중의 아기보단 태어날 주께 가득 찼습니다.

눅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어느 교회를 방문했더니 성탄 트리가 파아란 얼음색의 트리였습니다.

물어보니 북유럽스타일인데, 영화 얼음동화에서 나온 컨셥이랍니다.

그래서 내가 “내년에는 아프리카식으로 트리하세요” 했더니 “어떤 건데요” 되묻기에 “야자수에 장식하면 되지요” 하여 함

께 웃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주’보다는 트리에 머물거나 캐럴리듬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보십시오.

그녀의 고백을 보십시오.

주는 물론 구원의 사역에 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함께 읽읍시다.

눅1:50~53)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혹시 아시나요?

아침이 기다려지면 행복한 것입니다.

창밖에 비가 좋아지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고요.

하늘이 좋아지면 꿈을 꾸는 것이고요.

엄마가 그리우면 힘이 드는 거고요.

먼 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거랍니다.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한 사람은 리듬감에 관심 갖지만 힘든 사람은 가사에 마음을 둡니다.

 

그렇다면 주의 대해서는 어떨까요?

주님에 대한 모든 것이 믿어지는 신앙은 주님자체가 늘 신비롭고 경이롭습니다.

그래서 고맙고 즐거워합니다.

균형 있는, 성령의 인도 받는 신앙입니다.

며칠 전 방송사모금 방송을 들으니 제주도에 한 사업가는 “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 주느냐” 에 보답으로 참여한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의무보다는 은혜만을 권리인 냥 구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여인은 복중의 아기에게 마음이 가는 반면 성령의 여인인 마리아는 태어날 구주에게 마음으로부터 찬양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동일한 모습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달라도 같았습니다.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은 성령 충만했고, 주를 잉태한 마리아는 성령의 권능에 붙잡혔기에 한 구주, 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칸타타요, 탁월한 합창인 것입니다.

누가 소프라노인가? 알토인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용과 대상은 구주였습니다.

 

엘리사벳은 애 낳지 못한다는 절망 중에서 기쁨을, 마리아는 처녀가 잉태하면 돌에 맞아 죽는 현실의 두려움 속에서 믿음

으로 찬양했습니다.

이들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저편의 주의 구원을 믿었기에,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축복했고

마리아는 임마누엘의 주를 진술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떤가요?

보고 들리는 것은 분노와 절망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모습은 실제 세상의 모습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기대를 가질 수 없고 기쁨과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축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는 주를 잉태하진 않았지만 주를 믿음으로 함께하는 복 있는 자들입니다.

구주의 탄생을 기뻐만 하기 보단 찬양해야할 의무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시대와 국가의 미래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눅1:54~55)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세상은 혼돈과 혼란으로 어둡고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찼어도 우리 성도들이 엘리사벳이 되고 마리아 같은 성령의 충만이

있다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희망과 평강이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절망을 말하지 맙시다.

우리는 분노만 보지 맙시다.

우리는 임마누엘의 희망을 믿기에 믿음으로 긍정을 보고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다.

 

구주의 오심은 화평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인 나와의 화해와 화목,

분열과 분단의 화평을 주었기에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간격이 좁아졌듯이,

우리의 여러 분열과 갈등이 치유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결론) 구주의 성탄은 구주가 충만히 계셔야 합니다.

우리부터 두 여인의 마음 밭으로 가꾸도록 합시다.

“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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