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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화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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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6-12-25 14:09 조회 81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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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목사가 등산하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습니다.

머리만 성할 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12일간 혼수상태였다니 그 상태를 알만합니다.

그가 사고를 말하면서 지나놓고 보니 떨어진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답니다.

저는 그 말에 “ 아닙니다. 떨어진 것은 목사님의 부주의였고,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지, 나무에서 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1) 믿음의 화답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기독신앙이란 이해의 산물이거나 합리의 결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 계시에 의한 고백과 행동으로 빚어지는 믿음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똑똑한 말 보다 이 믿음의 고백이 많아야 합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했을 때,

마리아는 “눅1:38)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워지이다”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한마디로 아멘 한 것입니다.

이 고백이 언제나 요청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믿음의 사람들 속에서 일을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독자를 드렸던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아들이기에 다시 살리실 줄 믿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십시오.

가나안을 주실 줄 믿었기에 “올라가자 이기리라” 외쳤습니다.

이런 믿음은 세상을 이기기도 하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발견되기도 합

니다.

 

그럼에도 이 믿음을 다 저버리고 현재상황에 두려워하며 미래에 낙심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지난날 낮에 이 믿음을 묵상했습니다.

환한 대낮에 하늘을 보니 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찬란히 빛나는 별들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 감상한 별들은 전에 보았던 밤별에 기초했습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모양입니다.

히11: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이처럼 믿음에는 증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지식이고 경험이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이루워진 주의 성탄에 대한 믿음은 또 어떤 증거를 갖고 올까요?

오신 구주는 십자가위에서 우리를 대속하셨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마침내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왕으로써 우리를 인도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우리의 죄 문제만이 아닌 현재 삶과 노후의 삶과 사후의 문제까지 해결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도가 죄는 물론 삶에 있어서 현재와 노후에 매여서 기죽어 생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를 풀어 자유케 하셨습니다.

 

2) 성탄절

성탄절은 크리스마스라고 하는데 ‘구주경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탄절을 ‘믿음의 절’ 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오신 구주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사셨고, 장차 또 오실 것이기 때문에,

이 믿음의 시작이 성탄입니다.

 

박 대통령이 위기에 몰릴 때 그 아버지가 돌아가신 10,26을 탕탕절로 부르는 분노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이순신장군의 전사일을 순국절로 정하자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나올 수 있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도 성탄절을 ‘믿음의 절’로 다르게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처럼 노는 성탄절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성탄절의 유래를 아시나요?

성탄절은 고대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농경의 신(사투르스, Saturn)을 기리는 축제에서 기인했습니다.

낮이 밤을 이기기 시작하는 동지 즈음에 열렸던 축제로서, 사회질서가 뒤바뀌는 쾌락의 축제였습니다.

노예도 자유롭게 참석하고 주인이 거꾸로 노예에게 봉사하는 난장이었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로 국교화 되었어도 이 풍습은 계속되었습니다.

이교도의 축제를 금할 수 없게 되자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만든 게 성탄절입니다.

기독교가 왕성했던 중세시대에 와서 성탄절로 자리 잡았어도, 먹고 마시는 축제의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청교도 혁명 때 왕정을 폐지한 크롬웰에 의해 1652년도에 성탄절도 불법화했습니다.

지나치게 문란하고 영혼에 해를 끼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반발했고 찰스2세의 즉위와 함께 성탄절이 부활했습니다.

 

그러다가 청교도들이 미국에 가서 이 성탄절을 인정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고, 다른 기독교파들과 갈등을 빚고 또 미국이

독립 후 영국 풍은 배척하면서 사라질 듯했다가 1789년 12월 25일 성탄절에 미국 연방회의가 열리므로 이후 67년 동안 전

통이 이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이 주인공이 아닌 산타크로스가 되었는데, 코카콜라가 겨울철 콜라감소를 극복할 목적으로 코카콜라를 상징

하는 붉은 옷을 입은 싼타클로우스를 백화점에 등장시킨 것입니다. 이 싼타클로우스는 천주교에서의 빈자의 성웅인 니콜

라우스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도 성탄절은 거룩과 세상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날이 되었습니다.

가장 의미심장한 날이고 가장 놀기 좋은 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3) 참 경건

놀이는 사람들을 기쁘게 합니다.

유흥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네팔선교사님네가 오셨는데, 아이들은 놀이공원에 갈 참이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흥 보다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이 믿음을 착각하면 인간적으로 크고 좋은 것으로만 나타내고자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으뜸은 순종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권능이 너를 덮으시리니,,” 하심에 “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할 수 있었습니

다.

그 어떤 제사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또 이 믿음은 거룩입니다.

이 거룩은 세상과의 구별된 상태며 지속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요셉은 한동안 마리아와 동거하지 않았습니다.

주께 대한 믿음의, 순종의 연속적인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보면 여기서 무너집니다.

무엇이든 뚫는 창이 믿음이라면 무엇이든 막는 방패가 거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둘을 같이 사용해서 스스로 모순을 저지릅니다.

믿음은 하나님 섬김용이고 거룩은 나를 지킴용으로 알아야 합니다.

 

성탄절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경배했으면 세속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둘의 모양을 다 취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경배했으니 즐기자 할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상기하십시오.

어느 장로병원장을 만났습니다.

병원은 점점 커가고 학교와 봉사재단까지 있었고 병원 안에 교회까지 개척했습니다.

지역교회들과 연계해 목사님은 50% 교인들은 10% 치료비를 할인해 주고 있었습니다.

통일과 북한에 대한 관심과 애정, 제 3국의 의료봉사, 지역의 복음화 등 그의 일은 많고 컸습니다.

그리고 지난 총선에 출마했으나 여당 밭에서 낙선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그가 몸담고 있는 협회에서 회장선거에서도 낙선했다 했습니다.

목적은 훌륭하고 방법도 선량해 보였습니다만,

그러나 믿음인가? 거룩인가? 는 하나님이 판단하신다지만 의문이 들었습니다.

의사로써 정치까지 기웃거리는 모습이, 주의 왕국이 아닌 자기 왕국을 건설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 이런 면에 있습니다.

교회가 자기 때문에 파탄 나고 있는데, 본인은 “나는 위임목사라서 성도 1명만 있어도 떠나지 않겠다” 고 한다면 훌륭해

보이겠으나 이러다가도 좋은 데가 있으면 훌쩍 떠나는 것은 믿음과 거룩의 본분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결론) 참 경건은 참 믿음이고 참 거룩입니다.

어려운 것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는 일입니다.

순간이나 한때만이 아닌 평생이기에 실패와 시행착오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를 찾아오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 경건이 마침내 이루어집니다.

구주성탄은 그 증거이고 표적임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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