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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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두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사람은 겉을 본다.”
우리의 신앙은 범사에 대한 시각을 하나님으로 시각으로 옮겨가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특히 사람에 대한 시각적 변화는 확실해야 합니다.
1) 속과 겉
스텐포드 대학교는 미국서부의 명문대학교입니다.
그 학교가 1주일 만에 설립된 데는 웃픈 일이 있었습니다.
스텐포드씨가 장학금을 기증하려고 예일대학교를 찾았지만 수위부터 총장까지 박대했답니다.
주지사를 지내고 상원의원을 지냈던 그가 이탈이아 여행 중 아들을 잃자 몰골이 남루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겉을 봅니다.
주님이 배척 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 현대말로 하면 “개천에서 용 나겠냐?”
그러나 어떤가요? 드물긴 해도 실제 이런 일은 지금도 많습니다.
얼마 전 ‘한끼줍쇼“라는 프로가 성북동의 한 저택을 찾았는데 웅진그룹의 전 CEO 였습니다.
평사원 입사 18년 만에 CEO가 된 그리고 회사를 재벌로 키운 입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를 발굴한 직장 선배들의 혜안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보통은 그렇지 못합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사람을 보고 대하기 때문입니다.
스텐포드씨를 박대하는 일이 지금도 생기는 것입니다.
강남 역은 사람이 많이 붐비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세계적 바이올린 연주가가 평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명기를 들고 연주한다면 얼마나 그를 알아보고 세계적
연주가의 음악에 발걸음을 멈출까요?
2007년 바이올린리스트 조슈아 벨(피호영) 씨가 2시간을 연주했는데 약 2만 명이 스쳤지만 5명이 잠시 머물었답니다.
이것은 형식을 보는 것이지 기능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형식이 기능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속담에도“입은 거지는 얻어먹어도 벗은 거지는 굶는다.”
현대의 대한민국은 성형대한민국이 된 것입니다.
말세에는 교회조차도 이 같은 모양이 들어와 경건의 능력보다 모양을 받들고 있는 추세라면 어떨까요?
여기에 대한 경고는 무엇인가요?
딤후 3:5) ~ 네가 돌아서라
왜 그럴까요?
약2: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2) 새 시각
우리는 새 마음과 새 시각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마음과 시각이셨습니다.
사람을 거룩하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와서 판단 받고 상처 받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칫 수와보니게 여인이 그럴 뻔 했으나 결과는 주님이 그녀의 소원도 들어주셨습니다.
마리아가 창녀임 것을 아셨고 삭개오가 토색한 세리임을 아셨어도 그 일로 그들을 차별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안목의 훈련입니다.
작은 글씨는 돋보기를 사용해야 하듯이 내적을 보려면 영적안목을 훈련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합니다.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이 외모를 꾸미고 외모로 판단합니다.
자신의 콤플렉스가 남을 판단하는 안목이 된 것입니다.
마치 시집살이 했던 며느리가 늙으면 시집살이 시키는 시어머니가 된 것과 같습니다.
*긍정을 훈련해야 합니다.
칭찬도 인색한 사람이 누굴까요? 부정적인 사람입니다.
이들은 불만과 불평이 많고 오직 비교를 잘합니다.
그래서 칭찬을 해도 긍정이 없으니 오히려 비하가 되어 버립니다.
“박 집사님이 젊었을 때 현빈이 같았을 것입니다.” 하면 칭찬이지만
그렇지 않고 “북한에서 내려온 김영남 인민위원장 같다” 면 어떨까요?
이런 사람은 옷도 상표를 까봐야 직성이 풀립니다.
더 나아가 “이 옷 어디서 났어?” 까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새 마음과 새 시각으로 훈련된 사람은 긍정입니다.
“좋네”
겉을 보지 않고 옷을 귀하게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거 아시나요? “부처 눈에는 세상이 부처로 보이고 개 눈에는 다 똥으로 보인다.” 는,
*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비교 당하실 때 진노하십니다.
그게 우상숭배 아닌가요?
누구는 어떻더라 하지 말아야합니다.
왜 주님이 피 값으로 사준 형제자매를 외모로 판단하는지요?
손에 든 백이나, 타고 다니는 자동차나, 머무는 사무실이나, 집으로 판단하는지요?
여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들을 해야 합니다.
기도에 이와 같은 내용들이 있어야 합니다.
죄는 우월의식을 부추켜 자신의 잘난 모양과 타인의 못나고 부족한 면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3) 각양각색
하나님은 저마다 고유한 특성으로 빚으셨습니다.
그 특성이 그다움입니다.
동물만 봐도 알 수 있잖습니까?
잠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으로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노래를 잘하고, 악기를 잘 다루고,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짓고, 춤을 잘 추고, 달리기를 잘하고, 요리를 잘하고, 운동을 잘하
고, 생각을 잘하고, 힘을 잘 쓰고,
에서와 야곱을 보십시오.
에서는 사냥을 즐기는 털 사람이었고 야곱은 집이 좋은 매끈매끈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이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판단했다면 어땠을까요? 남이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아버지이삭과 엄마리브가로 판단했기에 형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인류의 비극이 여기서부터 온 곳입니다.
다름은 구별이지 차별이 아닙니다.
다름은 다양함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은혜의 수혜 방편인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섭리적인 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롬11:28~29)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어떤가요? 사도바울이 로마교인들에게 이해시켰던, 자신이 보았던 유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굼벵이 같은 사람이 있다면 구르는 용도라 여기시고, 번데기 같이 주름의 많거든 비단을 뽑아낸 존재로 여겨야 합니다.
목사세계를 보면 별별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목사님들은 학교나 연구소에서 신학발전과 제자양성을 하십니다.
활동적인 분들은 연합적인 사업들을 이루십니다.
큰 교회 목사님들은, 큰돈 내는 일들은 이분들의 몫입니다.
작은 교회 목사님들은 이분들은 소수의 교인들을 개인지도 하듯 하십니다.
다 자기 역할을 생긴 대로 은사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누가 누굴 판단하면 어떨까요?
약2: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결론) 사람에 대한 판단은 조심해야 하고 삼가야 합니다.
사람에 비난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향한 모독이 됩니다.
잠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참 신앙은 누가 약하면 힘이 되어주고 헐벗었으면 나누어야 합니다.
약2:15~16)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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