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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게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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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1-03-14 08:14 조회 41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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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동자는 둥근 반면 동물은 염소처럼 네모도 있습니다.

다가오는 천적을 잘 보기 위한 진화라는데 실제는 창조로써 이런 차이가 놀랍습니다.

 

1) 사울

사울은 일반적으로 보고 느끼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빛과 함께 만난 후 실명이 왔었습니다.

그리고 놀란 상태로서 기도하는데 환상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안수할 것이라는 주의 계시가, 또 아나니아에게는 사울을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는 환상이 왔습니다.

이 일은 주님이 조치하신 일이기에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주님이 함께하신 일답게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행9:18~19)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오래전 오른 쪽 눈에 파리 같은 점이 날아다니는 게,, 아주 불편했었습니다,

좀 기다려봤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안과의원을 가니 비문증이라면서 큰 병원을 가랍니다.

다시 큰 병원 갔는데 안구가 찢어졌다면서 레이져 수술을 권했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가니 미진한 부분을 또 레이져로 수술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검사나 수술도 없이 즉시 치유가 되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신기함의 답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성령께서 치유하신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이 거룩한 치유에 한 도구로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물론 성경은 이런 일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교회역사에도 이런 치유는 셀 수 없습니다.

6.25전후에는 한강백사장에서 부흥회가 많았습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면 버려진 목발만 해도 한 트럭씩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도 군대 가기 전까지 병원을 간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기도하셔서 6남매를 키우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죽을 폐병에서 기도 받고 순간적으로 나셨고, 나 역시 초등학교 때 성령의 불을 받았고, 어머니도 관절염에서 기

도로 순간 낫은 믿음의 가정 분위기였기에 아프면 기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시대가 발달하여 병원이 많고 의학이 발전하니 치유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보다는 의사를 더 신뢰하는

시대가 되어,, 하나님은 의사를 도와주시는 간호사정도가 된 것은 유감입니다.

지식이나 정보로 박식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해야 좋은 시대인데,,

이런 시대가 목회자로서는 점점 요원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지식이고 믿음 아닌가요?

그런데 이런 현장적인 믿음은 없고 도서관이나 강의실에서 듣고 배운 먹물믿음이 우세하니 목사와 교회가 성령과 충만을

모르게 됩니다.

아나니아가 어떤 사람인가요?

유학 다녀 온 박사가 아니라 그냥 제자였지만 경건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2) 다시 보게 된 눈

사울은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고 합니다.

전에 없었던 것인데, 어쩌면 암막커텐 같은 보호막으로서 주님을 뵙는 순간 강한 빛으로부터 보호하신 하나님의 조치일수

도 있고 아님 죄의 막일 수도 있습니다.

행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

한 나의 그릇이라

얼마 후 바울은 이 눈으로 복음과 사도직을 계시 받았고 하늘의 3층천도 보았습니다.

사울에게 이 경험은 대단한 경험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빈곤하고 피곤한 생활과 박해의 비참함에도 비굴하지 않는 믿음은 이런 하나님께 기초한 덕이라 믿어집니다.

 

안수 받고 사울이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은 마음의 변화도 왔다는 증거입니다.

흔히 우리가 “눈이 늙는다.” 하는 것은 눈에 백태나 녹내장이 왔다는 사실보다는 어렸을 때는 컸던 것이 지금은 작게,, 많

은 것이 적은 것으로 느껴진다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울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무얼 의미하나요?

이미 할례를 받았던 그가 과거와는 다른 하나님지식을 갖고 그 의를 인정하면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했다는 증거입니

다.

평생 자기 구원을 위해 자기 죄와 싸우면서 자기 공로로 의를 세우는 종교가 아닌 대신 죽으신 하나님어린양의 보혈의 공

로를 영접했다는 증거입니다.

 

이 안목의 변화,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변화라서 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에 임합니다.

 

이 변화가 없이 있는척한 것이 외식이고 바리새적 신앙입니다.

신앙의 관록과 직분을 내세우며 무언중에 갑질하는 이들이 다 여기에 속합니다.

진짜는 섬기려하지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아서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처럼 달라질 수 없습니다.

하물며 충만하면 할수록 인격의 깊이와 삶의 넒이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을 보았나요?

아나니아가 될 수도 있고 건강해진 사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어야 합니다.

 

이 변화는 전체적이며 전인격적입니다.

완전한 변화로서 유대인들이 당혹했을 정도였다니 알만합니다.

행9: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서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전에는 이런 유대인들과 친구였습니다.

같은 것을 보며 같이 느끼며 같이 행동했었는데 이제는 아니니 저들이 당혹했던 것입니다.

성도의 변화에는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다.

좋았던 것이 싫어지고 싫던 것이 좋아지고,,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3) 변화

사울이 전에는 스테반을 죽이는데 가담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허무는 해로운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변화된 한 사람으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의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앞서“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모두가 좋아졌습니다.

 

삶의 변화가 성령의 변화냐 아니냐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변화는 즉각적이든 아니든 예수님이 봉우리에 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증인이 됩니다.

온유와 겸손이 있고 긍휼이 동반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변화는 변질일 뿐 참변화가 아닙니다.

 

우리는 변화를 위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또 행복을 위한 평안도 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더 구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감을 갈망하여 성령을 구하며 충만을 구합니다.

 

이 후에 예수 믿는 나로 말미암아 내주변이 좋아집니다.

이럼이 성령 충만의 증거이고 주동행의 모습입니다.

비록 좁은 길을 갈지라도 주 없이 넒은 길을 가는 사람 보다 심사부터 월등히 좋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야고보서는 말씀합니다.

약3:16~18)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

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결론) 자신부터 다시 보게 되길 원하시나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것도 판단 받지 않게 됩니다.

성령 충만은 그냥 오질 않습니다.

성령을 구하십시오,

충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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