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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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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1-03-28 08:24 조회 34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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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이 시작되기에 아름다운 고난이란 제목으로 설교합니다.

 

세상에는 불명예가 있고 성도에게는 아름다운 고난도 있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명예가 불명예라면 고통이 따른 고난이라도 동기가 선하면 아름다운 고난이 됩니다.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우니라

 

1) 고난

인생은 고난을 위해 태어났다고 했으니 고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어떤 고난을 겪었나요?

대체로 일반적인 고난으로 가난과 건강 상실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노숙이나 구걸은 없었고  치료  못 받은 일은 없는 줄 믿습니다.

청년들은 어떨까요? 군 생활이나 공부가 나름 힘들었다지만 성장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함께 받은 말씀의 수신자는 당시의 노예들이었습니다.

전쟁의 포로였든 값으로 팔리었든 내가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믿는 탓에 국가와 주인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아야 했으니 어땠을까요?

비슷하게는 20세기 중반까지 자유를 외치는 미국에서 흑인들이 인종차별을 겪어야 했었고,

또 지금은 아시아인들이 흑인으로부터 차별을 겪고 있다니 아이러니합니다.

이민자 생활로 몸과 생활이 힘들지만 이런 차별로 더 힘들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억압과 착취로 고통스러웠던 일제 식민지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서는 천민들의 슬픔과 이름조차 없던 여성들의 고통이 가난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저항이 있었습니다.

동학과 같은 민란이거나 민정이었고 일제에는 독립운동이었습니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기질은 여러 가지입니다.

손대면 움치려드는 것이 있고, 으르렁거리며 싸우자고 대는 것이 있고,

숨거나 도망가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공부나 구경이 재미있는 것은 이런 기질로 말미암는 사회상 때문입니다.

고난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로 움츠려들게 마련인데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단한 사람들인데,, 고난이 좋아서도 아니고 고난의 유익을 알아서만도 아닙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

라

이들이 누구인가요? 노예든 상전이든,, 언제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2) 성도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부르심이 있는데 단순하지만 확고한 주님을 따름입니다.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주님이 친히 본이 되셨는데,,

주님 닮은 고난의 자취를 따르는 사명인 것입니다.

 

이런 고난은 싫어도 할 수 없습니다.

감당해야 할 내 몫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찬339장) 내 주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러므로 불러주심에 감사하고 쓰임에 감사해서 순종하면 즐거운 길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과 흡사한 말씀이 사도바울을 통해서도 하셨습니다.

고전7: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여기서 부르심이 두 번 나오는데 첫째는 소명을 말하고,,

두번째는 현재의 신분이나 처지를 말 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주어진 삶의 형편 속에서 주님을 위한 수고와 고난도

당연히 여겨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훗날 종교개혁자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모든 직업이 성직”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신학교를 나와야만 하나님의 종이고 교회 일을 해야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야합니다.

22절)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절)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 부탁하시며

 

보여주신 본이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나요?

세상은 수단과 방법을 따지지 말라고 하는데 주님은 정반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에 반대되는 의, 거짓에 반대되는 진실, 욕하지 아니하고 위협하지 않는 온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

음,, 이 가치 때문에 고난과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이 아닌 의와 진실과 착함이기에 이 성품이 뼛속의 골수가 되어야 합니다.

 

종종 찾는 동네의 냉삼겹살집은 아주 싼 식당입니다.

돈 벌자는 식당인데 퍼주는데 뼛속의 골수까지 후합니다.

남들 다 오른 고기 값이 수년간 그대로이고 상추나 파가 비쌀 때도 여전히 제공되었습니다.

알바비도 후했는데 여주인장은 자칭 자기가 손해 보는 주의랍니다.

그런데 망하지 않고 되레 단골들이 늘었다니 착한 사람이 사는 비결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세상을 사는데 여러 소신과 자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고난을 따르는 자세는 무엇인가요?

 

3) 믿음, 소망, 사랑으로

만주를 다녀보니 독립운동가들의 고난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난과 고통은 애국애족 그리고 독립이라는 소신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오늘 자유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 부모들 역시 가난 통에서 우리들을 키워냈으니 사랑이고 소망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처절하기 그지없습니다.

24절) 주님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나무에 달려” 아주 끔찍한 고난과 고통 아닌가요?

그 이유는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

니,,”

죄의 세력을 없이하려고 고난을 당하셨고 죄값을 지불하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믿음의 기대와 사랑 그리고 소망의 희생이었습니다.

 

우리도 숱한 고난과 고통을 감내하며 삽니다.

피할 수 없고 다른 방법이 없으니 체념하기도 하지만,,공통된 맥이 있습니다,.

믿음이 작용하여 소망을 갖고 사랑으로 고난을 감싸 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고난에는 유익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으로 반전을 이룩하셨습니다.

벧전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또한 은혜 받은 성도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는 고난도 아름답게 하십니다.

19~20) 부당하게 매를 맞고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중요한 것은 나에 대한 포기가 없으면 고난은 불가능합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나의 포기는 희망사항으로 그칩니다.

그거 아시나요? 나에 대한 존재감과 붙드심은 주님께 맡기고,,

나는 주님을 붙들고 나에 대한 포기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거야 말로 가장 큰 믿음입니다.

막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사도바울의 면류관은 빌립보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고난을 많이 겪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면류관은 성도요, 곧 교회입니다.

 

결론) 주님은 우리를 위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가시관을 쓰고 계시나요?

가시관의 고난이 있어야 영광의 면류관이 됩니다.

고난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 주님 닮고 따르는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왕으로써, 세상의 사랑과 인권과 자유와 치료와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자원하는 작은 고난이라도 있어야 됩니다.

고난 주간에 한끼 금식하며 기도하고,,

한끼 식사비를 폐지 줍는 동네노인에게 드리는 일도 주 따르는 동행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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