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같이 비둘기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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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선교사 된, 침례교목사 한 분이 북한에 억류되었습니다.
본인도 그 가족에게도 교단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국가적으론 이산가족 상봉으로 다소 고무된 남북관계가 다시 원상태로 갈 듯합니다.
그가 북한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날, 인터넷에는 무수한 조롱의 댓글이 실렸습니다.
몇 가지만 소개하면 “기도하세요.”
“들어갈 때는 하나님의 뜻이라 했는데 가보니 하나님이 없지?”
“하나님의 도움으로 탈북자가 되라”
“국가가 가지 말라는 곳을 왜 갔니?”
“협상하지마라”
턱 보아도 알 수 있는 안티 기독교들의 댓글이 많았지만 작게는 염려와 상식의 글도 있었습니다.
1) 조심
얼마 전 이집트에서 우리 국민들이 폭탄테러를 당했습니다.
성지 순례하던 교인들인 만큼, 역시 많은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집트는 여행 자제국가였기 때문입니다.
늘 출장 가는 저에게 가까운 분들은 ‘조심’을 당부하곤 합니다.
해외의 경우 ‘여행자보험’은 필수가 되었습니다.
상식은 최고의 이성입니다.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이 있습니다.
Don't believe, just think
이를 무시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억류된 선교사도 우리 정부의 허락 없이는 북한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나봅니다.
납치된지 5개월이 지나, 북한에서의 기자회견을 통해 비로써 알 수 있었음은 이를 반증합니다.
믿음과 무모함은 다릅니다.
믿음은 이성과 함께 한다면 무모함은 이성을 떠난, 무지와 과신과 맹종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교회의 어느 부인은, 죽은 남편의 부활을 기다린 나머지 그 시신을 장례하지 않고 7년이나 안방에 두었다니 믿음은커녕 미친 것 아닌가요?
아들이 신령하다고 해서 아들에게 무릎 끓은 체, 그 아들로부터 안수 받으면서 계시의 말씀을 듣겠다면? 이게 믿음인가요?
실제 수년 전 그 일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향해서 “주님, 아버지” 했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은 질서를 허무는 신을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순결해도 가치가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께, 한 순례전도자가 찾아와서 이르기를 “하나님은 지난밤에 이 교회에 가서 설교하라 셨습니다.” 했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그래요? 하나님은 내게 그런 말씀을 왜 안하셨을까요?” 하며
거부했답니다.
물론, 믿음은 상식 밖의 일도 이룹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성을 초월했기에 ‘기적’이라 합니다.
그러나 아십시오. 흔하지 않는 것이 기적입니다.
아픈 교우들의 경우, 이 기적만을 바라고 믿다가 치료도 온전히 하지 않아 마침내 실망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미국의 크리스챤사언스 교인들은 더 그렇습니다.
의사와 약은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탓에 살 사람이 많이 죽게 됩니다.
잘못된 믿음입니다.
이성은 일반적 은혜입니다. 누구에게나 주셨습니다.
세상을 사는 데는 이성이 절대적입니다.
이성의 상식이 먼저이기에 “뱀처럼 지혜로워라” 가 먼저 등장한 겁니다.
어느 날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산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절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상식이 먼저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믿기에 막 할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기에 조심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 주님의 시대
주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마10: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당시, 세상의 안티기독교와 그 악랄함을 지적하시고 경계시키셨습니다.
주님이 계셨던 시대도 그랬거늘 지금은 오죽하겠나요?
문제는, 그렇다면 보내지 말고, 가지 말아야 될 텐데,
주님은 보내셨습니다. 어찐 이유일까요?
빛의 속성은 밝힘입니다. 그래서 도전적이고 적극적일 수밖에 없고 어둠은 이 빛을 거부하기에 싫어합니다.
여기에 충돌은 불가피하고 희생은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의 상황입니다.
아프리카에서도 그랬습니다.
식인 부족이 개화된 것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가 아닙니다.
잡혀죽은 초기 선교사들의 피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이 빛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러나 가장 어두울 때가 참 빛이 필요한 때입니다.
며칠 전 우주정거장의 우주인이 한반도를 디카로 찍어 NASA에 보낸 것이 언론에 공개되었습니다.
보았나요?
우리나라는 불야성인 반면 북한은 평양에만 불빛 하나있을 뿐, 나머지 지역은 암흑이었습니다. 중국의 동북3성도 환하다보니 우리나라는 마치 섬처럼 고립된 모습이었습니다.
실제의 전기사정이고 또한 경제사정입니다.
그러나 의미적으로도 영적상황이기도 합니다.
여기는 예수 믿고 전하는 신앙을 거부하고 학대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어둠의 체제인 까닭입니다.
요1:5) 빛이 어두움에 비추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 깨닫지 못하는 적극성이 ‘박해’입니다.
북한 지하교인들을 소개한 영화 ‘신의 아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상영관에서 조차 상업성이 없다하여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반면, 오래 전 미국에서의 벤허, 모세, 쿼바디스 등이 인기 상영된 것과 그 처지를 상고해 보십시오.
바로 빛과 어두움의 차이입니다.
3) 뱀처럼, 비둘기처럼,
상황을 인식했나요?
그 방편이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게입니다.
뱀의 지혜가 일반적 은혜의 이성이라면 비둘기 같이 순결함은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식사를 해도 젓가락을 쓸 때와 숟가락을 쓸 때가 다릅니다.
하물며 선교에는 더합니다.
이러한 전략은 세상이 능합니다.
연합으로 할 때가 있고 혼자 은밀히 할 때가 있습니다.
물자가 앞서 들어갈 곳도 있습니다.
평양의 과학기술대학교는 평양의 엘리트코스입니다.
그외 기독교가 세운 몇몇 병원도 있습니다.
다 빛의 전파 목적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충돌과 박해보단 환영받으며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뱀의 지혜가 있어야 충돌이 작고 피해를 최소화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비난거리를 제공하지 않으며 국가에게 짐도 지워지지 않게 됩니다.
믿음의 순결함만이, 열정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지혜가 있어야 빛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많은 규제가 있습니다.
전 정권은 ‘전봇대’라고 했고 현 정권은 ‘손톱 밑 가시’라고 했습니다.
왜 많은 줄 아시나요?
각종 사고를 당한 후 대책마련에서 나온 장치들입니다.
이게 딜레마입니다.
규제를 풀자니 사고가 나오고 규제로 이중 삼중의 장치하니 발전에 저해됩니다.
하나님 나라도 그렇습니다.
이러자니 저렇고 저러자니 이렇고 등등,
그 묘안이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입니다.
달리 말하면, 좀 늦어도 좋다. 몸도 생각하라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열심과 좋은 믿음 일수록 “내가 지금 다한다.”식 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월도 필요합니다. 진짜는 주님이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무슨 말씀인가요?
잡혔을 때에 대답할 말씀만 주신다는 의미인가요?
그 이상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숫닭이 울어서 새벽이 오질 않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숫닭은 착각하여 시도 때도 없이 울기만 합니다.
건강한 숫닭은 때에 맞추어서 잘 울뿐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수탉은 새벽에 울 수밖에 없는 자기의 사명을 알고
감사함으로 홰를 치며 노래합니다.
결론) 우리의 기도는 더 진진해야 합니다.
이유는 무엇이든 억류된 호주의, 미국의, 우리나라의 선교사를 사랑으로 품고 무사귀국을
기도해야 합니다.
북한당국의 변화도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에는 뱀 같은 지혜를, 생활에는 비둘기 같은 순결함을 지녀야 합니다.
지혜에는 모략이 나옵니다.
순결함에는 진리와 의가, 믿음에는 사랑이 흘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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