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궁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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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과 점심 한 끼를 하는 비용이 약 40억이랍니다.
누가 있을까 싶지만 신청자가 많아 경매로 결정한답니다.
그렇다면 초강대국인 미국 대통령과는 어떨까요?
우주의 주관자인 하나님과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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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료 초대권
내가 초청받아 미국 대통령과의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다면 신문방송에 뉴스가 될 겁니다.
또한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겠지요.
그런데 이 워렌 버핏과 미국 대통령을 세우신 ‘하나님의 초청’에는 별 감동이 없습니다.
가문의 영광보다는 지겹게 여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료의 식사자리에 부르셨습니다.
곧 ‘예배’입니다.
예배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만 아닙니다.
십자가만 바라보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들어가 더불어 하나님을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시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를 사모하는 일, 곧 예배입니다.
아시나요? 이스라엘 백성은 예배하기위해서 출애굽의 은혜를 입었음을,
성막은 어떤가요? 오직 예배하기위한 처소였습니다.
또한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예배’라는 주제로 가득 차있습니다.
가장 으뜸의 계명이 무엇인가요?
주님은 신명기6:4~5을 인용하시면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막12:29~30)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예배가 모든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무엇인가요?
주일을 잘 지키는 건가요?
예배에 참석하는 건가요?
‘참 예배’는 하나님의 모든 것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합니다.
믿음은 그 거룩한 뜻에 순종하고자합니다.
그러므로 참 예배는 예배당을 떠나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예배당의 예배는, 운행 나갔던 택시가 회사 차고로 들어와 정비하고 세차하고 주유 받는 일과 흡사합니다.
한주간 삶의 예배를 위한 격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잘하면 영혼이 소생합니다.
밭의 시든 작물은 소낙비를 맞아도 소생합니다.
베란다의 시든 식물은 마늘 한 통을 갈아 물에 타 주면 힘을 얻습니다.
일상의 유혹과 괴로움에 지든 영혼은 박카스나 커피가 아닙니다.
주를 바라볼 때 살아납니다.
2) 정한 예배
동서양에는 연회는 물론 식사예절이 있습니다.
예절이 얼마나 소중한 전통인지, 남과 나를 위한 예의입니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아카데미상이나 대종상을 보면 남성들은 턱시도와 여성은 드레스를 입습니다.
어디든 옷 자랑으로 가는 느낌도 지울 수 없으나 턱시도와 드레스는 남성과 여성의 정장입니다. 엄숙한 품격을 의미합니다.
결국 그 식을 높여줍니다.
예배가 그렇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도 안됩니다.
예배의 인원을 늘린다고 마구마구 불신자를 초청하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2장에서 혼인잔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12~14절)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이 예복, 주의 보혈입니다.
이 예복을 입은 자는 곧 성도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벧전2:9)
참 예배는, 하나님께 성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신령한 일입니다.
찬송, 고백, 예물, 그리고 죄의 자백까지 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변질된 예배는 자꾸 사람이 등장하고 자꾸 하나님께 무언가 받으려는 일이 앞섭니다.
미국의 어느 가정에서 실제 일입니다.
갓난아기가 세례를 받는 날이었습니다.
교회는 광고를 하고 지역 신문도 축하를 했습니다.
그 날, 그 집에 사람들이 모여 축하하며 샴페인을 터트렸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보이질 않은 걸 어느 부인이 깨달았습니다.
“아기가 어디 있나요?”
엄마는 아차 싶어 아기 방에 가보았지만 아기 침대위에 어른들의 외투가 덮여있어 아가는 질식사 했습니다.
잘못된 예배가 이렇습니다.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 없습니다.
사람과 요란함과 지식은 있는데,,
잘못된 예배의 결국은 무엇인지 아시나요? 망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였다가 3천 명이 동족에게 도륙 당했습니다.
취지는 좋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모세의 큰 조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한 향불이 아닌 것으로 예배하다가 죽어야 했습니다.
역시 취지는 더 나은 예배를 드린다하여, 정한 향이 아닌 것으로 드렸다가 화를 입었습니다.
법궤는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어 이동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새 수레에 실었습니다.
취지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레가 움직이자 떨어지는 법궤를 손으로 잡은 웃사가 죽었습니다.
웃사는 법궤에 손 못 대는 봉사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야속한가요?
오히려 하나님이 야속하다하지 않을까요?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요일과 장소와 시간을 초월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와 방종은 다릅니다.
본문의 요나는 훌륭한 예배자였습니다.
불순종하였지만, 회개하며 물고기 뱃속에도 주를 향했습니다.
욘7: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하나님은 이런 언제나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욘2: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3) 감동만 따르면
모 교회에서 이룬 박 지혜양의 간증과 연주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독일에서의 어머니와 함께 살며 바이올린 연주자가 된 것하며 세계적 연주자가 된 후 우울증을 앓고 극복한 것 하며 인생승리였고 과연 하나님께도 영광이었습니다.
저도 좋아 여러 사람들께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본 후 좋은 소감 말고 다른 소감도 생겼습니다.
이런 감동이 과연 설교에서 얻을 수 있으려나? 하는 우려였습니다.
솔직히 목사들의 설교에 이런 감동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빼고 이런 감동을 주기 위해서 간증과 연주를 하면 어떨까?
여러분은 어떤가요?
그럴 수 없습니다.
교회당은 공연장이 아니고 아주 큰 감동을 주는 공연이나 연주나 간증이라 해도
설교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족해도 설교는 ‘계시의 하나님말씀’이라는 권위가 있기 때문에 들어야 합니다.
예배의 큰 요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세우셨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느니라”
간증과 연주와 공연은 ‘지식의 감동’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지혜의 감동’입니다.
맛은 작을지 몰라도 격은 높습니다.
현대교회는 격보다도 맛을 선호합니다.
설교보다는 연주, 공연, 간증 등에 길들여졌는데 예배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예배는 결코 자연스런 일이 아닙니다.
대중이 흠모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된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 이 요청됩니다.
결론) 목사에게도, 예배는 익숙한 일이어도 힘듭니다.
혼자 오전에 예배하려면 밤으로 미루게 됩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예배하면 하루내내 힘을 얻어 또 예배할 수 있고 밤에도 예배하며
저녁 기도가 분향함 같기도 합니다.
무슨 얘기 인가요?
로켓트가 대기권을 뚫고 우주로 나가는 일을 연상 하십시오.
대기권을 뚫는 일이 어렵습니다.
예배는 육체의 소욕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이를 이기면 우주에서의 유영을 하듯 하나님과 거니는 예배의 영광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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