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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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빛의 화가인 렘브란트는 본문에서 영감을 받아 ‘탕자의 귀향’이라는 명품을 남겼습니다.
훗날 20세기에 하버드대학교의 교수였던 헨리 나우웬은,
이 명작에서 소명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그 명작에서 고무되어 ‘탕자의 귀향’ 이란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제는 21세기 일산의 목사가 그 책을 읽고 한 번 더 설교하고 있습니다.
제목이 ‘하나님아버지’가 아닌 ‘아버지하나님’인 까닭은 보편적 하나님보다
개인적 하나님으로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1) 본문의 이해
본문은 예수님의 예화입니다.
죄인이 회개였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심을 나타냅니다.
앞서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와 연속된, 찾은 자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안의 전통적인 유대교가 메시야인 자신을 배척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다른 의미로는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린다하면서,
그리스도예수를 거부하여 결국 하나님을 불신하는 모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큰 아들은 유대교 혹은 이스라엘인이요.
둘째아들은 이방인인들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모습이고 교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은혜를 받고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교회 안에는 아버지를 떠나지도 못했고,
따라서 돌아온 사실과 감격의 기쁨을 모르는 큰아들과 같은 존재들이 많음을 보았습니다.
작은아들이 집나갔다가 돌아온 탕자라면 이들은 집안의 탕자였습니다.
목회를 해보니 언제나 문제는 둘째아들보다 큰 아들로 말미암아 생겨났습니다.
변화에는 수직적 변화가 있습니다.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의 변화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이 변화는 살아있는 변화인 만큼 그리스도 예수를 흠모하여 계속자랍니다.
반면 수평적 변화는 겉의 변화입니다. 모방입니다. 종교인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 부터의 이탈을 해보지 않았으니,
언제나 아버지 품속에만 있다고 생각하여 아버지의 은혜가 절실히 고마운 줄 모릅니다.
중국 경구 중에 “천권의 책을 읽음보다 천 걸음 여행이 낫다”며,
여행의 우월함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독서는 죽은지식입니다.
남의 지식을 ‘내것화’ 하는 일입니다. 이 지식은 많이 잊힙니다.
그럼에도 물론 유익합니다.
그러나 여행은 아무리 짧아도 산 경험이기에 참지식이 되어 ‘완전내것화’되기에 으뜸입니다.
울산 간절 곶에서 출발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1년간 횡단하는,
세계여행을 하는 ‘빼빼가족’이 있습니다. 5가족 가족모두가 말라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얘들 휴학시키고 집 팔아 여행경비 만들어 중고버스에서 생활하며 여행 중입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합쳐 30여 개국에 이르는 여행,
시베리아고원과 바이칼 호수,
우랄산맥을 넘어 프랑스를 거치고 얼마 전에는 이란도 통과했습니다.
어느 자율고가 이렇고 명문대학이 이러나요?
그들의 부모는 물론 자녀들의 가슴에 가장 아름다운 보석을 심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시작은 내가 죄인이라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아버지하나님을 만나는 감격과
그 후 생활의 동행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아버지하나님을 떠난 빈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즉,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있을 때의 위기의식 등 입니다.
이게 없으면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않고 구원자 앞에 달려 나가지도 않고 구원 후의 감사와 감격이 없습니다.
배부른 사람에게 마른 떡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절실하지 않은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겠나요?
탕자의 경험이 없는 현대교회가 의인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귀향한, 은혜의 의인이라면 감격이 있으련만 ‘자칭의인’이 많기에, ‘자칭 부자’ 가 많기에,
‘자칭 랍비’가 많기에, ‘자칭 지도자’가 많기에,
행세하고 군림하는 사람들이 많아 교회마다 충돌이 많고,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하여 주 떠난 교회들이 태반입니다.
수평적 변화는 복음의 능력이 아닙니다.
신념이고 의지입니다.
그래서 중도 포기가 있고 멈춤이 있는 겁니다.
본인도 세상도 변화시킬 힘이 없습니다.
타오르다 꺼지는 불꽃입니다.
그러나 수직적 변화는 아버지 사랑에 기인한 복음이 능력이기에 언제나 타오르는 불꽃됩니다.
개인만이 아닙니다.
이런 교회는 생기가 있습니다.
사랑도 있고 용서도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2)아버지
본문은 3부자가 나옵니다.
여러분은 화가라면 누구에게 초점 맞추겠습니까?
물론 렘브란트는 집나간 후 귀향한 작은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니 이 아들은 아버지 품에 안겨있었습니다.
오랜 여행에서 남루해진의복과 신발이 강조되었고 그럼에도 지체높은 신분을 상징한 냥
허리에는 단검을 차고 있었습니다.
다른 누구는 둘째를 반기는 아버지의 부적절함에 화가 난 큰 아들을 부각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연코 으뜸은 아버지여야 합니다.
아버지였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람브란트는 귀향한 아들을 끌어안은 아버지의 표정은 물론 어깨를 감싸고 있는 양손을 다르게
그렸습니다.
한 손은 투박했고 한 손은 부드러웠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해석하기를 투박함은 통치의 손이고 다른 손은 자애의 손으로 봤습니다.
하나님께는 아버지의 부성과 어머니의 모성이 함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맞습니다.
이 두 본성이 다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알라처럼 무서운 아버지만 있지 않습니다.
힌두교의 크리슈나처럼 자비로운 어머니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꼭 처벌하시는 거룩과
죄인을 안으시는 사랑의 성품으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신분입니다.
그러기에 돌아온 아들은 용서하시며 기뻐하시고 잔치를 베풀어주시고
집안의 아들은 상기시켜 주십니다.
이 보다 더 아버지를 나타내는 일이 있습니다.
눅15: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당시 유대의 관습은 아버지가 별세해야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살아계실 때에 상속해달라는 말은 ‘빨리죽으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 재산분배를 해주었습니다.
그것도 원하는 아들만이 아닌 두 아들 모두에게,
‘각각’주었습니다.
나가는 자식만이 아닌, 집안의 자식에게도,
무엇인가요?
*아버지께는 구별은 있어도 차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교만은 자신들만이 ‘신민’이라는 특권의식이 강했습니다.
히틀러가 유대인의 학살을 자행했던 것도 이 신민의식을 증오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지식인이나 야만인이나 차별이 없는데 후대에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그 편견을 갖고 전쟁까지 불사합니다.
아버지께는 두 아들이 각각 다르지만 똑같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이 민족의식이 강했기에 타민족에게 복음전하길 기피했으며 그들이 구원얻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평을 터트리기도 했습니다.
민족의식이 필요하긴 합니다.
타민족과의 구별과 선의의 경쟁으로써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신들만 특별나고 타인은 ‘개’라고 하면 어찌 되겠나요?
고전3:21~23)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그러므로 아버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열려있습니다.
이 자유가 방종으로 치닫는 것은 우리의 무지와 편견의 탓입니다.
그거 아시나요?
버어마 사람들은 만들레이 왕이 머물던 궁전의 탑을 가리켜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고, 중국 사람들은 자기나라를 ‘중화민국’이라고 부르면서 중국은 중심에 있고 다른 나라들은 모두 가장자리에 있다하며,
일본사람들은 자기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 종족이라고 믿어 왕을 ‘천황’이라, 왕세자를 ‘태양의 존엄한 아들’이라고 씁니다.
남아프리카의 호텐토트사람들은 ‘완전한 백성’이라 부르고,
에스키모인들은 스스로를 ‘사람 중의 사람’,
미국은 자기나라를 ‘하나님이 세운 나라’로 일컫습니다.
다른 하나는, 집나가는 아들을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대든 아버지를 능가하는 아들이 드뭅니다.
아버지는 앞선 경험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대학 총장은 어렸을 때 성적표를 고쳐서 아버지께 보여드렸더니 아버지가 기쁜 나머지
동네잔치를 해주었답니다. 이 아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공부에 전념하여 유학박사가 되어왔습니다. 아버지가 병상에서 임종을 맞이할 때 지난 일을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용서를 빌고자 했답니다. “저 아부지요. 옛날에 나 1등한 것 있잖은..”
이때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막았답니다. “ 쓸데없는 소리 마라..마, 니 엄마 오라해라.”
아버지는 아들의 1등의 비밀을 알고 계셨던 겁니다.
아들이 나가면 고생하고, 탕진할 것 다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만류하지 않았던 것은 사랑이나 표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격적대우’를 하신 겁니다.
그리고 돌아올 것을 아시고 떠난 날부터 기다렸던 겁니다.
본문의 만남의 모습을 보십시오. 아들이 아닌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께는 그냥 돌아온 아들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온 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하나님이 이러셨던 겁니다.
뿐만아니라 제 3의 아들, 제 4의 아들이라도 돌아오면 여전하실 겁니다.
3)아버지하나님
작은아들이 아버지를 떠나겠다했을 때에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버지가 좋았다면 머물렀겠지요.
그러나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은 좋았으면서도 아버지는 싫어했습니다.
스스로 의존적인 존재가 독립적인 존재로 탈바꿈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의 ‘이탈’
타락의 모습은 ‘허랑방탕’입니다.
타락의 결국은 ‘저가 궁핍한지라’
찬송가440, 1절)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없이 다니니
이 모습은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아담부터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너나할 것 없이 편안은 한데 평안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 향하는 일이 ‘회개’입니다.
결론)아버지하나님을 등지게 만드는 이 죄에 매여 있는 한 인류는 소망이 없고 개인 역시도 평안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아버지를 떠난 곤란함이 있었나요?
아버지를 회상해 보십시오.
그의 품은 넉넉합니다.
기다리는 아버지요. 알아보는 아버지요. 맞이하는 아버지이요. 용서하시는 아버지요.
잔치를 베푸신 아버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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