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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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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4-04-05 17:21 조회 1,15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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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 약용선생은 한양시절,

마당에 국화 화분 수십 개를 길렀답니다.

길 가던 사람이 열매 있는 유실수를 심지 않고 어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국화만 심느냐고

타박하자 다산선생은, 형체만 기르려들면 정신이 굶주리게 된다며 실용이란 입에 넣어 목구멍을 넘기는 것만 가리키지 않는다고 대답했답니다.

그러나 삶을 보면 실용인 농사외에 문학이나 예술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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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버지

아버지를 보면 애당초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실용적인 분이 아닙니다.

작은아들이 허비할 것을 알고도 원하는 재산을 떼어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귀향했을 때에 본전 생각나서 후회한 것이 아니라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15:24)

아들에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요즘 인문학이 대세입니다.

인문학이 무엇인가요? 사람을 대우하는 지혜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피폐해진 경제상황에서 현재의 고도성장을 이루다 보니 실용, 오직 돈,

오직 쓸모 있는 것만 중시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상처를 받고 사람이 죽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귀촌, 귀향이 많은 것은 실용중심과 돈 중심의 현대적 도시생활에서 싫증입니다.

이러한 때, 인문학이 대세인 것은 자본주와 고경제성장국가의 폐단에서의 깨우침이며 회개인 겁니다.

 

2)큰아들

그렇다면 큰아들의 처신은 무엇인가요?

동생의 대한 태도가 입증합니다.

그는 귀향한 동생에 대해 아버지와 달랐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손해를 끼친 몹쓸 자로 치부했습니다.

그는 동생을 찾지도, 기다리지도, 맞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맞이한 아버지에 대해서 오히려 항의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없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일이 없더니” (눅15:29)

 

*철저한 자본가, 실용주의의 모습입니다.

옛 선현들은 실용주의를 오랑캐의 습성이라고 치부했는데, 이 습성만 있을 뿐입니다.

동생과 아버지에 대해서 돈으로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거 아시나요? 제사장을 의미하는 ‘빌“ 祝에는 맏이 兄이 들어 있습니다.

씨족사회에서 형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가정을 다스리는 위치의 존재입니다.

지금도 이 가풍이 있어 형을 ‘형님’이라고 높이고 있습니다.

 

놀부와 흥부가 현대는 많이 각색되어, 놀부는 계획성 있고 흥부는 그렇지 못한 부류로

비춰졌지만 실제는 나쁜 형을 고발한 이조시대의 풍속소설입니다.

홍길동이나 임꺽정전이 부패한 탐관오리를 고발했다면

흥부전은 집안 재산을 독식한 나쁜 형의 고발인 셈입니다.

 

본문의 이 형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집나간 동생을 노심초사 기다리고 귀향했을 때에 맞이했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동생을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 동생이 형에게 폐 끼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직 그의 심사가 오랑캐심사기에, 놀부 같기에,

동생이라 할지라도 돈에 대해서만 언급했을 뿐 그 동생의 귀향이나 고생은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귀향하여 아버지의 환영까지 받으니 배가 아픈 겁니다.

 

우리나라는 韓민족이라지만 예부터 恨민족이 되었습니다.

한도 많습니다. 가난. 무식, 상놈 등, 자기 부족의 소치입니다.

형처럼 이 심보를 갖고 배고픈 것은 잘 참는데 비해 남 잘되는 꼴을 못봅니다.

동네 편의점에 갔더니 한문귀가 적혀있었습니다.

“코끼리 식당의 항의로 더운물을 제공 못합니다. 고소한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문제는 더운물이 아니라 그 식당의 간의 의자에서 컵라면을 먹고 그곳에다 빈통을 버린 것이 문제가 된 겁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문제는 쓰레기보담 식당이기에 심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웃간에 ‘고소’얘기가 오고갔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의 말이 있습니다.

돈 잃어버리는 것은 괜찮은데 손님 뺏기고는 못산답니다.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존심? 아닙니다.

손님을 뺏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돈. 실용입니다.

우리의 교육은 이 한를 만회하고자 어릴 때부터 교육받습니다.

왜, 영어 유치원에 보내나요?

왜, 1류 대학을 가려하나요?

왜, 이과의 수재들이 의대를 가며

왜, 의대생들은 외과 내과 보다 성형외과를 선호할까요? 좋은 사람 되기 위해선가요?

 

208년 4월 11일자의 모일간지 사설입니다.

일본 청소년 연구소가 한국, 미국, 일본, 중국의 고교생 1000~1500명씩 설문조사를 했는데,

‘부자가 되는 게 성공한 인생이냐’는 질문에 한국은 50.4%,일본33%, 중국27% 미국22.1%

였습니다.

또한 ‘돈을 벌기위해선 어떤 수단도 괜찮다’는 답도 한국은23.3% 미국21.2% 일본13.4% 중국5.6% 보다 높았습니다.

‘돈으로 권력을 살 수 있다’에는 미국, 일본, 중국은 30% 안팎인 반면 한국은54.3%였습니다.

‘조국이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했을 때,

‘앞장서 싸우겠다’에 일본41.1% 중국14.4% 한국은 10.2%,

‘외국으로 나가겠다’는 일본1,2% 중국2,3% 한국10.4% 였습니다.

이쯤되면 윤리실종 아닌가요?

교육이 큰아들 같은 이들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똑똑할수록, 출세할수록 자기만 알고 부자여야 한다는 잘못된 의식의 결과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이들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으니 하루 5억 황제노역과 법관들이 있는 겁니다.

 

묻습니다. 이 아버지의 장례 때에 작은 아들이 많이 울까요? 큰 아들이 많이 울까요?

집안의 위기 때에 누가 발 벗고 앞설까요?

누가 불효자라면서 애통할까요? 진정한 효자는 누구일까요?

작은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3) 나중된 자가 먼저되리라

지난주에 언급한 람브란트는 큰 아들 그려놓았습니다.

잔치할 때 실제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 얼굴은 아버지 닮았고

모습은, 두 손을 앞에다 모은 채 공손히 서 있는 담담함이었습니다.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왜 그처럼 그렸을까요? 헨리 나우웬은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고 귀향전의 동생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동생의 가출을 내심 부러워했고 또 동생의 귀향을 내키지 않은,

오지 않았더면 아버지의 재산은 자신의 것이 되었을텐데의 이기심의 모습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보다 세상과 세상의 있는 것을 사랑한 사람들은 실용적인 일이 아니면

관심을 갖질 않습니다.

누가 아프거나 죽어도 연민을 갖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났을 때의 환희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잔치에도 무덤덤했던 겁니다.

환율과 부동산 소식과 증권소식에 울고 우는 모습과 얼마나 대조적인가요?

이들은 자기 자리만 고수할 뿐입니다.

*소위 기득권을 포기 못하는 수구세력 모습 아닌가요?

 

이 모습, 주를 만나기전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물질주의 적인 모습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의 물질주의 모습을 아나요?

호화롭고 웅장한 예배당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거라는 믿음이 물질주의입니다.

드려진 예물의 양에 따라 하나님이 복 주시길 기대하면 곧 물질주의입니다.

부자만이 하나님의 복 받았다고 부러워하는 것도 물질주의입니다.

 

또한 기득권의 모습을 아나요?

군대에서는 상급자가 후임자를,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괴롭힙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교회도 이 모습이 있습니다.

이들이 가장 좋은 믿음인 냥 행세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들만 관심 있습니다.

그래서 개교회 중심적이 된 겁니다.

한국교회에서 제일 몹쓸 말은 교회중심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교회당 중심 아닌가요?

성경적인 듯하지만 가장 세상적인 말입니다.

오히려 세상중심이, 성경적으로 타당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용적이고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보다 더 나은 가치가 있습니다.

신용, 의리, 자비등, 물품이 아닌 사람에 관해서입니다.

그리고 기득권이 득세하는 교회에서도 나은 가치가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특히 길 잃고 방황하는, 죽은 한 영혼의 구원입니다.

정말 이들을 사랑할 수 있고 이들을 위해 있는 것을 팔고 빚이라도 낼 수 있고,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큰 교회요 큰 신앙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교회를 아직 보질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목회를 관두고 그 교회에 등록할 겁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아버지심정의 목회가 있는가 하면 큰아들의 심정의 목회가 있었습니다.

목사의 눈으로 보면, 집나간 아들을 찾는데 많은 돈과 열정을 쓰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이 돈 쓰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모으는 교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는 목자의 심정, 잃는 양 찾는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큰아들 보다 돌아온 작은아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 감격이 있어야 됩니다.

예배가 감격스럽고 섬김이 기쁠 겁니다.

여러분은 누구인가요?

돌아왔나요? 아님 큰아들인가요?

돌아온 아들은 빚진 자로 살 겁니다.

반면 큰아들은 늘 정죄하고 비판하겠지요?

설령 그것이 옳다하더라도 교회의 힘은 아니고 신앙의 유익은 더욱 아닙니다.

 

결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답니다.

포도원에 가서 일 하라 했더니 큰아들은 ‘네’하고 가지 않습니다.

작은 아들은 ‘싫어요’ 했지만 곧 뉘우치고 가서 일했답니다.

 

누가 효자인가요?

그렇다면 진정한 탕자는 누구인가요?

돌아온 작은아들인가요? 여전히 집안에서 행세하고 굳어버린 마음의 큰아들인가요?

큰 교회, 큰 신앙은 무엇인가요?

자신의 으뜸이나 물질을 구함인가요? 아니면 영혼을 사랑하여 찾음인가요?

엡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함 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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