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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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보면 별별 질문과 지식들이 올라옵니다.
2009년도에 올라온 질문인데 “승려에서 목사가 되거나 타종교에서 목사가 된 경우는 많이 있길레 좀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의 사례는 찾기가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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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한 답이 궁금하시지요? “타종교에서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평신도의 개종은 많이 있어도 목사는 없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무덤의 흔적은 있어도 빈 무덤인 까닭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간입니다.
1) 빈 무덤
승려 한 분이 여러 종교의 경을 읽다가 우리의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의 빈 무덤을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흔히 있는 개종입니다.
공자의 묘는 대만의 대난에 있습니다.
마호멧트의 묘는 이슬람교의 두 번째 성지인 메디나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의 묘는 없습니다.
관리 소홀이 아니라 장사된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만에 하늘에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은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과 하늘에서 오시고 다시 오르신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보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은, 살아계심은 물론 전능하심을 믿으며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과 그 분의 대속하심을 내 사건으로 받아드리는 일입니다.
성령을 믿는 일은, 신자의 보혜사가 되심입니다.
특별히 부활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일이지만주님 부활전에도 있었습니다.
주님 변화산에서 변형되실 때에 구약의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습니다.
엘리야는 산체로 들림 받았다 할지라도 모세는 죽었던 자였습니다.
신34:5~6)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합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합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모세의 분명한 죽음을 기록이 아닌가요?
묘지도 있었습니다.
다만 헛된 믿음을 부추킬까봐 그 무덤을 모르게 했을 뿐입니다.
삼국지의 조조는 자신이 죽은 후에 적이나 도굴꾼에게 무덤이 파헤쳐질까 두려워
그 방지책으로 무덤3개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모세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우상숭배의 요인이 될 듯하여 감추인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그는 부활하여 천국에서 있었다가 주님의 장례를 위해 변화산으로 왔습니다.
마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이스라엘의 영광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떤가요?
그도 죽었습니다.
175세였습니다.
앞서 죽은 부인 사라가 묻힌 곳에 같이 묻혔습니다.
창25:9~10) 그 아들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그러나 그는 낙원에서 살아있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만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바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러보건대 낙원도 참말이요. 부활도 참말입니다.
창20: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하시니
또한 이 모든 말씀을 하신 예수님과 그 모든 말씀도 진리입니다.
요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인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부활과 생명
현 지구상에 인류는 65억이 넘습니다.
지나간 역사상에 얼마나 많은 인류가 스쳐갔을까요?
그러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주님외에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자칭 예수가 많이 있었습니다.
생전에 추종하던 이들이 있었지만 자칭 예수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웅변이 아니요, 수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부활과 생명을 나사로에게 주입시켜 부활과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신대로, 성경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 제자들 보다 먼저 가셨습니다.
부활은, 죽을뻔하다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이며, 일시적이지 않고 계속된 삶을 살 수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왜 장례는 3일장인가요?
행여 살아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다시 죽었습니다만 주님은 40일을 넘게 사시고 산몸으로 공개적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사실의 의미는,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장사되고 성령으로 다시 사는 삶의 원리이기에 주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은 주요합니다.
마침내 승천과 재림까지 영광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믿지 못하면 우리 신앙은 헛깨비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신 것입니다.
골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세례는 실질적인 고백입니다.
3)제자들의 믿음
월드컵 축구를 뉴스로 듣는 것과 실제 운동장에 가서 보고 느끼는 것은 다릅니다.
아니 그 운동장도 밖과 안이 다를 겁니다.
나중에 월드컵 소식을 전한다면 운동장에 있던 이들은 증인입니다.
인터넷 뉴스를 접한 이들은 변호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가까이 접한 이들은 누굴까요?
이들에겐 예수님의 부활 후의 40일간의 생생한 삶의 경험도 있습니다.
눅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이들이 겪은 주님 부활의 생생한 경험은 당대를 변화시켜버렸습니다.
더욱이 부활의 확신은 모든 두려움을 능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은 소망이 되었기에
(빌3:10~11)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 신앙은 고난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자연 비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자기 몸에 채우려 하는 가상함으로 나타났습니다.
초대교인들의 출중함과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처럼 똑똑하지도 않았습니다.
교회도 체계적이지 않았습니다.
노예들과 가난한 이들이 태반이었습니다만
‘예수 다시 사셨네“ 신앙이 소망적이고 보니, 이 신앙에 성령님까지 덧입혀주셔서 세상이 어쩌지 못하는 신앙이 될 수 있었습니다.
21세기의 신앙은 어떤지요?
정치적입니다. 타산적입니다. 똑똑한 신앙입니다.
머리와 입술로만 웅얼거립니다.
반면 성령님은 탄식하십니다.
“예수다시 사셨네”를 믿는다고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 안에서 다시 삽니다.”는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는 것은 오직 ‘돈’입니다.
왜요? 그것만 붙들고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더럽혀진 하나님, 나침반-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마가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말들에게 끌려 다니다 죽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에서 목매달려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러 달려죽었고
예수님 동생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몽둥이에 맞아죽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으며
바돌로메는 터어키에서 맞아 죽었고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엑스자형 십자가에 못 박혔고
도마는 인도에서 수없이 찔려 죽었고
유다는 화살에 맞아 죽고
유다를 대신한 맛디아는 돌에 맞고 참수까지 당했고
바나바는 돌에,
바울은 로마에서 네로 황제에게 도끼로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이들에게 부활 신앙이 없었다면 비굴할지언정 이처럼 비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들은 천국에서 그 이름이 빛나고 있습니다.
계21: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우리의 신앙은 매 순간마다 기로에 서있습니다.
죽어도 좋은 신앙 자태가 아니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사모해야 합니다.
결론) 국가적으로 또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진도 선박 침몰은 역시 인재입니다.
선장과 다른 승무원들은 먼저 탈출했답니다.
그러나 한 여성승무원은 끝까지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챙겨주다 죽었습니다.
자기생명 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요?
우울증 걸리지 않은 이상 다 살기를 바라고 죽음은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이 부활신앙은 사망과 불의를 이기게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스테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행7:59)
여러분은 어떨까요?
부활신앙이 회칠한 것 같아서는 안됩니다.
부활신앙은 죄를 이기고 불의를 혐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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