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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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자기의 몫이라면서 오직 열심히 공부만 하는 자식이 좋습니까?
아님, 공부는 좀 떨어지더라도 부모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식이 좋습니까?
하나님은 후자입니다.
제사, 곧 예배보다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사울 왕이 불순종하자 하나님은 순종 잘하는 다윗을 후대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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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 언제나 그랬습니다.
1)예레미야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는 개혁적 제사장 가문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기에 기존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대립각을 세웠기에
호세아 선지자처럼 평생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기존의 주의 종이라 칭하는 이들은 예루살렘성전을 중심으로 제사가 일이였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기뻐하는 위로와, 평강의 메시지만을 선포했으나 예레미야는 달랐습니다.
다윗의 가문으로 말미암는 유다왕국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이 사역은 외롭고 고달픈 사역이었습니다.
멸망의 선포, 유다왕국이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서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현재 사역하고 있는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교만하고 나태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잊은 것 하나있는데, 역설적으로 다윗의 후손이라는 혈통과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때맞추어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만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잊은 것입니다.
이 유다왕국의 멸망, 예루살렘의 붕괴는 이 잘못된 믿음을 허는 1차적인 하나님의 사업이었던 것입니다.
헐어야만 다시 세우는 회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렘1: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결론적으로 제사장과 선지자와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입술에 의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포된 말씀대로 마침내 기회를 잃어 철저히 망했습니다.
그리고 70년간의 포로생활이 후 환국한 백성들로 다시 살아나도록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시대의 신앙모습을 봅시다.
렘7:4~6)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성전중심 신앙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윤리가 실종되었습니다.
렘7: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착각하기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렘7:10)
비슷한 일이 주님께도 있었습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주님은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기도나 예배가 아닌 성전정화를 하셨습니다.
돈 바꾸는 환전상인을 향해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리라”는 충격의 발언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중심신앙, 제사중심신앙에서의 죄악을 보신 겁니다.
그리고 비유로, 자신이 새 교회의 머리로써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돼지머리나 기암괴석에게 경배해야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포괄적 우상숭배가 됩니다.
2)윤리실종
지금 우리나라는 큰 슬픔에 빠져있습니다.
몇몇 선박운영자나 직원들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 윤리실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로마의 교황이 “윤리가 회복되는 계기로 삼아야한다.”며 위로했을까요?
세계적으로 큰 대형교회들이 모여 있는 우리나라,
셀 수 없을 만큼 교회당이 있는 나라,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나라,
새벽, 삼일, 금요기도회가 많은 나라 아닌가요?
그런데도 부패지수는 3년 연속 하락하여 조사대상 177국가 중 46위이랍니다.
중간이 넘었다고요?
순위가 위에서 아닌 아래서부터 오릅니다.
유독 기독교만 있나요?
천주교, 불교도 막강합니다.
관공서와 조직과 회사마다 신우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위의 수치로 본다면 우리 신앙들은 위선이고 자기기만이고 자기사랑과 자기여유를 찾는 일에 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신앙과 얼마나 흡사한지요?
서로 뒤질세라,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짓기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멋지고 우아한 예배들, 한결같은 고백들,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삶은 유치찬란한 삶,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셨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하여 윤리적 존재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기뻐하시는 순종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 돌아옴은 예배만이 아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6:6)
하나님의 진노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는 일입니다.
예배, 헌금, 전도, 친교,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애와 공의를 이루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암5:23:24)
윤리의 으뜸은, 사람을 향한 긍휼, 자비, 배려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옛 애굽의 노예 되었던 일을 상기시키시면서 “나그네 대접”을
주입시켰던 일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나그네는 누구일까요?
또 다른 일은 공의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빨리빨리”를 외쳤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 탓에 편법과 불의가 성행하고, 무뎌졌고, 결국은 그 짐을 부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열납되기 위해선 예배분위기를 띄우기 보담 인애를 회복하고
우리의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선 열심의 기도 보단 공의를 회복해야 합니다.
곧 강도의 굴혈을 헐고 새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3)자기중심적 신앙
사울왕의 실패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신앙이었습니다.
소년 다윗에게 인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제사하는데 탈취물의 가장 좋은 것으로 제물 삼았습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림‘이라는데 함정이 생겼는데 거기에 빠졌습니다.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삼상15“19)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음으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삼상15:23)
유대왕국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제 들어 벌써 몇 번째 신문 광고를 보았습니다.
아마 일간지 전체에 실었나 봅니다.
모 순복음교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자신들과 통합한다고 계약서까지 작성한 후,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고,
모 교회는 3000억 예배당을 지은 후 현재목사님의 부당함을 알린 내용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고사하고 덩치 값을 못하는 상황입니다.
온 나라가 비통함에 젖어있는데, 이때에 꼭 저래야하나? 싶었습니다.
그쯤되면 ‘위로문’을 실었다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죠지무어 박사는 미국의 리버티대학교 부총장입니다.
그가 학생들을 데리고 빈민국을 찾아 그곳의 얘들과 함께 놀았습니다.
그랬더니 동행한 학생들 중 일부는 “사역하러 와서 사역은 언제하느냐고..“ 타박을 했습니다.
이때 박사는 ‘이게 사역이다. 예배이다...“ 며 교훈했답니다.
반면, 금번 세월 호 사건에서 일반국민들이 보여준 정성은 드라마보다 더 감동 아니던가요?
기도와 자원봉사, 물품증정과 성금, 안산 올림픽 분향소에는 수만 명이 다녀가고,
귀환을 바라는 노란리본은 개나리꽃처럼 온 나라에 활짝피웠습니다.
안산시의 택시 10대는, 안산과 목포간을 운행하며 유족들을 무료로 태우고 있습니다.
편도 13만원이 든답니다.
의왕시는 어떤가요?
자신들을 위한 추모공원을 제공했습니다.
바라는 기적은 없었지만 희망기적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누가 진정한 주님의 사람들인가요?
우리의 신앙을 점검합시다.
예배, 기도, 헌물보다 삶의 인애와 공의가 넘치는가?
참예배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드린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사울 왕은 가장 좋은 제물을 드린다고 했으나 불순종으로 아니드림만 못했습니다.
우리는 삶이 예배가 되고 몸이 제물 되어야 합니다.
보이는데 따르고 다수를 따르다가는 넓은 길로 갑니다.
당대의 예레미야는 다수에 비해 틀렸습니다만, 결국 그가 옳았고 다수를 따른 제사장 선지자들과 예배자들은 함께 망했습니다.
사울 왕, 좋은 것 드렸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의 과정이 무시되었습니다.
탈취물은 다 제거해야 했으며 그는 제물을 드리지 못하더라도 ‘순종’해야 했습니다.
결론) 신앙에도 삶처럼 의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담대합니다.
하나님께조차도 담대함이 있습니다.
예배중심이 되기 원한다면 순종 중심으로 돌이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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