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께 부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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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은 거울 3개를 품고 살았답니다.
단정함을 위해서, 동경! 옛날에는 구리거울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교훈을 받기위해서는, 사경! 역사는 반복의 교훈이 있어 시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경인데, 주변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가?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답니다.
지난 주간에 존경하는 모 목사님의 명예철학박사 학위식에 참석했습니다.
26번째의 학위였습니다. 대통령이 축전을 보냈고 앞선 대통령의 영부인과 3명의 전국무총리와 전대법원장, 전국회의장, 전연세대총장, 대권후보들이 참석했습니다.
현직보다 전직이 많았는데 교계의 어른인 까닭입니다.
1)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초대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로마제국만이 교회를 핍박하지 않기에 본문은 후대의 그리스도인에게도 미칩니다.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성도에게의 고난은 언제나 있음이 성경의 계시이고 역사의 교훈입니다.
정치적으로 말미암는 고난,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말미암는 고난도 있습니다.
대충적인 신앙에 불시험은 없습니다만 잘 믿고자할 때 저항에 부딪혀 고난을 겪습니다.
이러한 때는 하나님이 떠나셨고 저주가 온 듯하여도 느낌이고 생각일 뿐,
실제는 하나님은 함께 계시고,
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동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스도인이 영광을 돌리기에 적합한때입니다.
벧전4:16) 만일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많은 그리스도인의 착각의 반대입니다.
대형 교회당을 지어놓고 그 교회에 분란이 있다면, 하나님은 수치를 느끼실 것입니다.
유명목사님의 교회에서 재정장로가 헌금관련일로 목사님께 이의를 제기하고 자살했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수치입니다.
벧전4: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그러나 믿음으로 살려고 발버둥 치며 대세보다 좁은 길로 가려는 역경의 그리스도인에게는 함께하시며, 기쁨을 얻으시는 줄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복음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고 그 나가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함을 얻으리라” 또 언약하신 것입니다.
구원이 미완성이거나 미흡해서가 아닙니다. 주의 단번에 말미암는 구원이지만 계속 두렵고 떨림으로 얻을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기에 사람처럼 살아야 하나요? 아님, 사람처럼 살아야 사람인가요?
전자입니다.
구원받았기에 구원을 이루는 성화이지 구원을 이루워야만 구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벧전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서리요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적으론 합당합니다.
돌과 보석을 구별하는 의도된 과정이요.
그리스도인에게도 유익합니다.
고난자체보다 고난이 주는 유익이 좋기 때문입니다.
벧전4:19) 그러므로 하나님의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벧전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특수부대의 군인들은 자부심이 있습니다.
유별난 군복과 휘장이 상징입니다. 그 상징 속에는 고난의 숱한 훈련이 있었습니다.
2) 현대의 고난
옛 로마시대는 아니지만 그리고 일제시대 만큼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있습니다.
고난이 무엇인가요? 꼭 핍박의 결과인가요? 좁은 길을 따르는 모든 역경 아닌가요?
잠시잠깐이 아니라 계속된 고난에 변절을 우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라보는 자에게’ 은혜를 주어 감당케 하심을 믿어야합니다.
베드로, 사도바울, 역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셨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는 말이 항간에 있습니다.
신앙에는“두려우면 지는 거야”로 각색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총칼의 협박도 무섭지만 교회 안에 들어 온, 묘한 사치나 허세, 신앙적 통합을 내세워 분별하기 심히 어려운 시대입니다.
여기서 돌아선 고독감, 왕따, 가난함, 현대그리스도인의 감내해야 할 고난입니다.
모 목사님이 책을 보내왔습니다.
‘눈먼 기독교’ 현대 우리나라기독교와 교회 자화상이 담겨있었습니다.
저자되신 목사님이 오래전 아프리카 수단에 가서 콜라를 사려는데, 병은 코카콜라인데 내용물이 누리끼리하더랍니다. 두껑은 퍂시이고, 이상하다 싶어 의심하니 주인은 “우리나라는 가난해서 모든 것을 재활용합니다. 그러나 내용물은 안전하니 잡수세요.” 하길레 믿고 마셨더니
콜라가 아닌 환타였답니다.
서론이었지만 우리나라의 기독교와 흡사하답니다. 지지합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희안합니다. 점점 더 종교의 통합을 이루워가고 있습니다.
희안한 내용들이 판을 잡고들 있습니다.
세상이 융합이니, 통섭이니 하며, 학문과 대학학과가 퓨전을 이루더니 교회까지 미쳤습니다.
진리 아닌 것이 진리인 냥, 구세주가 아닌 것이 구세주인 냥 붙잡고 믿어야할 가치와 대상이 되었습니다.
박애주의, 희생주의 좋습니다만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과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여기다 붙이면 않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의 사랑이고 심판의 사랑이고 구원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은 구세주이시지 박애주의 희생주의의 대표자가 아닙니다.
늘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정신을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 어린 양으로서의 ‘대속’입니다.
종교다원주의로, 이 물결이 물질주의와 성공주위가 함께 설교의 패러다임을 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처와 같은 인간인가요? 불교와 이슬람교 유교는 신이 없습니다만 우리는 신론이 있습니다. 같은 가요? 천주교는 마라아를 그리스도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을 수 있나요? 교제하고 교통할 수 있나요?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 행4:12)
그러나 지금은 이 계시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만’이 아닌 “예수도‘가
되었습니다. 어디서 왔나요? 인간의 사상입니다. 그 사상의 근원은 철학 아닌가요?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야 되나요?
이 사상은 세상의 지지를 끌어내어 “참 신앙은 성숙함이다. 신과 구원은 같다”고 외칩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고수는 하나를 이룬다.” 하며, “저수들의 신앙은 경직되어 독선적이다. 합니다.
과연 그런가요? 그래서 고난 없는 신앙이고 그래서 그처럼 복을 받아 유명하며 살찌고 교회는 800억을 싸놓고 그 재정장로가 자살하고 하나요?
너무 넓은 길로 간 것 아닌가요?
예수님을 잊은 것 아닌가요? 조물주께 부탁할 것이 없는 것은 아닌가요?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13:8)
그렇다면 영접하는 믿음도, 경배하는 믿음도 ‘오직’ 달라지지 않는 계시와 성령에 의해야 합니다.
3)미래시대
미래학자들은 앞으로는 한 종교만이 있을거라고 합니다.
그 조짐이 벌서 보였기에 실감납니다. 교리가 소용없습니다. ‘좋은 말’ 이면 될 듯합니다.
신학공부 없이도 목회성공을 이루고 있습니다. 운영을 잘하면 됩니다.
이때에 기독신앙을 갖는 일은 어떨까요? 지구인이 되기를 포기할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장에서 불편하고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점점 그리스도인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종교만 있는 세상일지라도 교회는 끝까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한 성도, 주께 부탁한 한 성도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주를 믿고 따르는 일은 내 몫에 십자가를 주께 맡기는 일이 아닙니다.
내 십자가는 물론 주의 십자가도 메는 일입니다. 그렇게 가다보면 마침내 주 머문 곳에 당도하는 데 그곳이 천국인 줄 믿어야 합니다.
꿀물에 익숙하지 마십시오. 꿀도 쓰게 느껴집니다.
쓴물에 감사하십시오. 쓴물도 감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결론) 참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 헤아려 본 적이 있습니다.
주의 재림나팔소리에 나의 이름 불려질까? 생각해 보셨나요?
시련과 어둠의 시대를 지나야 합니다. 이 때의 고난은 필연입니다.
여기 해법이 있습니다.
벧전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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