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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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뉴스를 보면, 누가 누구를 죽이고 누가 잠수교에서 투신자살하고 등 일색입니다.
사회적 지위를 가진 성년들이 그러했기에 지탄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왜 그들이 그랬을까? 가장으로서의 충성심이 그랬나? 그렇다면 직장에 불충성하면서 가장의 충성을 이룩함이 옳은가?
마귀의 꼬임에 빠졌나? 돈을 사랑함이었나? 어떻게 생각되나요?
다 합쳐진 결과입니다.
1)상황
위의 일은 비단 개인만이 아니고 최근의 일도 아닙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요즘 문제되고 있는 갑과 을에도 심각합니다.
회사는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회사를 운영하는 직원들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 탓입니다.
앞으로는 이와 같은 일들이 더할 것입니다.
살기가 어려워 부정부패는 증가하고 단속으로 뇌물액수도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마다 법은 마피아란 이름을 빌려 여러 이름으로 지정하며 척결하는 대책을 내놓지만
그 뒷면에는 저들만의 상책도 발달할 것입니다.
학력이 높아진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소에서 돼지머리 고사를 치르기 때문입니다.
경제력이 향상된 것과도 상관없습니다. 더 좋은 집과 차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위와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은 그 직위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상황은 사람이 문제입니다. 양심이 문제입니다. 교육이 문제입니다.
말세의 특징은, 돈을 사랑함과
마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래서 이 시대에는 중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떡이냐? 자유냐? 신앙이야? 대세냐? 다수냐? 진리이냐?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제사장적 목회를 할 것이냐? 예수의 제자로 살 것이냐?
결정적인 어느 한순간은 쉬운데 지속된 생활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의 순간결정이 영원을 결정짓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이들이 잡혀서 감옥가고 자살할 줄 알았으면 그렇게 했겠나요?
다 뒷탈이 없을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의 아비이기에 자꾸 준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목숨까지 빼앗습니다. 반면 주님은 주신 것은 없어 보이는데 실제는 다 주셨습니다.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2) 군자
군자는 도덕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지혜를 갖춘 사람입니다.
군자의 힘은 도덕에 있습니다.
도덕은 절제력이 있습니다. 매사에 ‘삼가 각근히 행하므로’ 혹은 ‘배우고 익힌 대로 행하여’
자기를 세우게 됩니다.
어릴 적 학교에도 도덕시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절과 예의 그리고 국민적 기본소양을 깨우쳤습니다만
현대는 이런 시간과 과목도 없어져 기본을 터득하지 못한 체 성인이 되곤 합니다.
싸가지 없는 얘들, 추잡한 어른, 다 어디서 나왔나요? 도덕이 실종되었기 때문이요.
인간성이 멸종된 탓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회는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찬밥이고 국영수위주의 학과와 취직위주의 학과와 기술기능을 중요시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잘못 들어온 며느리가 3대를 망하게 하듯이 잘못된 교육은 100년을 망치게 합니다.
천박한 자본주의의 폐단이고 개인자유주의의 한계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군자보다 나은 이가 있다면 희망이 될까요? 어떤 이들인가요?
그리스도인입니다. 단순히 교회당을 출석하고 교회의 직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회심하고
성령 받은 성도입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들은 자기 절제력이 아니라 아예 자신을 죽은 자로써 여기고 생활하기에 새 성품의 삶을 구현합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본문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못박았다고 했는데,
육체가, 죄가 몸의 지체 안에서 죄를 짓기에 죄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 원천이 죽어서 막혔으니 올라올 썪은 물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전에는 어땠나요?
육체의 길은, 갈5:19~20)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육체의 소욕은, 보이지 않는 마음과 생각입니다.
그 정이란 무엇인가요?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써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자기사랑이 대표적입니다. 야망은 무섭습니다. 탐욕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사랑과 야망이 합쳐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 권력까지 합세해서 절대군주가 되면 세상은 재앙을 만나는 것입니다.
탐심이 있습니다. 더 가지려는 마음인데 끝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며 거부하는 심사입니다.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예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영입니다만 거부하고 거역합니다만
그렇지 않아 이런 사람들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부정과 불의가 타락한 몸 안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된장항아리는 된장이 있습니다.
김치항아리는 김치가 있기에 김치항아리입니다.
타락한 몸은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떠나서, 누구나 언제든지 육체의 일과 육체의 소욕을 내뿜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이 시끄럽고 감옥소와 재판정이 늘어가고 전쟁이 발발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종교, 대다수의 수양, 대다수의 윤리는 육체의 일과 소욕이 불량한 것으로 깨달는 것과 멈추는데 국한되어 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그 본성과 소욕은 어쩌지 못해 낭패를 겪습니다.
예로, 과거 조선은 선비가 주체인 사회였습니다. 군자가 많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탐관오리가 많았고 민초는 피폐했습니다. 결국 망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도덕이나 도덕인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조선은 유교였습니다.
이론은 있으나 지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3)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육체의 일과 소욕은 물론 항아리된 육체도 못 박히고 장사되었습니다.
내가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하셨기에 내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
마치 ‘아바타’ 같습니다.
아바타를 움직이는 용사는 사고로 잘 움직일 수 없는 병사입니다.
그러나 그가 캡술 안에서 아바타를 지시함으써, 전혀 다른 족속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 그리고 함께 부활한 나, 나는 나인데 달라졌습니다.
모양이 아니라 성품과 성향이 달라졌습니다.
자기나 돈 사랑이 아니라 주님 사랑이 되고 이웃사랑까지 이어지며 야망이 아니라 다수의 소망으로 나아가 희망을 줍니다.
탐심도 달라졌습니다. 명예, 돈,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나라발전, 영혼구원으로 바꾸어졌습니다.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법을 금지할 수 없느니라
육체는, 몸은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는 도구,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 이웃을 인도하는 도구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새창조를 이루셨고 성령님은 나의 새 명령자가 되신 것입니다.
“여길찌어다”는 명령어가 나옵니다. 믿어라 행하라는 성령의 ‘Enter'입니다.
롬6:10~11)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본 경험이 없기에 “여길찌어다”에 뒷걸음만 칩니다.
점프대에 올라서서 침 삼키는 아마추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닙니다. 이제는 순종해야합니다.
갈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이 기쁨을 아셔야 합니다. 이 보장을 실감해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일도 처음이 어려울 뿐입니다.
결론) 보십시오, 다른 세상이 전개되었습니다.
갈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많은 분들이 이런 말씀이 이상적이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상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맞습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이상은 이상일 뿐입니다.
이상은 구현됩니다. 내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화하질 않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살면”을 이룩해야 합니다.
불교는 “깨달으라”가 답이며 유교는 ‘조상들의 은덕’이랍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답’이고 믿음이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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