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적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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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마를 잡아다가 길들이는 일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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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탄 기수를 떨어트리기 위해 극렬히 저항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수용했는데, 기수는 이때 말을 마장 밖으로 몰고나갔습니다.
마침내 적응했고 기수의 움직임대로 따라주었습니다.
그 다음은 숙련이었습니다. 기수의 움직임을 숙지해서 호흡을 맞추는 단계인데 시간이 말해주었습니다.
1)사람의 단계
사람도 위와 같이 비슷합니다.
큰 위기가 닥치면 처음에는 부정합니다.(왜 내게 이런 일이? 아니야!)
그 다음에는 해결해 보려고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합니다.
마침내 할 수 없지의 체념이 옵니다.
그리고 그 여건에 익숙해집니다.
개그맨 이 동우씨는 망막색소변조증이랍니다. 후천적으로 맹인이 되는 과정에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지금은 그 생활에서 안정되고 나름의 행복을 찾아 누리고
혼자 길도 나서고 맹인으로써의 공연도 하곤 합니다.
처음 이 병의 판정을 받고 실망과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에 비하면 너무나 달라진 것입니다.
2) 신앙단계
신앙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주와 은혜 앞에서 다르게 반응합니다.
*부정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부정했습니다.
그 뜻 앞에 자신의 뜻을 앞세워 다시스로 도망했습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고생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해친 사울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왕 삼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윗을 제거함이 마치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냥 했다가 결국 자신이 망했습니다.
이 신앙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입니다.
*침노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정탐꾼들에 비해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에 입성하는데 적극적이었습니다.
다른 정탐꾼들은 가나안의 아낙족속이라는 거인족속만 보았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었기 때문입니다.
수1: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적극적 신앙이고 믿음입니다만 위험이 따릅니다.
주의 계시가 없으면 자기 신념이 되기 쉽상입니다.
과거의 십자군 원정이 과연 주의 뜻이었을까요?
현대의 수백원의 예배당건축과 우리 기독교가 카톨릭과의 일치운동이 과연 주의 뜻일까요?
2014년 부활절인 4월 20일을 앞두고 바티칸 대변인인 Giorgio Salvadore 추기경이
“재림에 대한 약속은 예수님의 취중실언이다.”했습니다.
성경의 계시를, 주의 언약을 정면으로 부인한 것입니다. (관련기사, "Jesus Not Coming Back The Looks of It" Admits Vatican)
이들은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열심을 다합니다만 과연 주의 뜻에 부합될까요?
신념이 위험한 것은 집단적으로 움직일 때에 믿음인 냥 당위성을 갖게 됩니다.
*수용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자신은 물론 시대와는 달라도, 그 뜻에 손해와 핍박이 따라도 주의 뜻이라면 받아들이는 성숙한 신앙자태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천사가 등장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했을 때에,
놀라기는 했어도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했습니다.
자신이 없어지는, 어쩌면 돌 탕에 맞아 죽거나 아님 평생을 미혼모로 살 각오도 포함된 고백입니다. 훌륭한 믿음입니다.
사무엘을 키운 엘리제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아들이 잘못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엘리제사장은 어찐 일인지
그 아들들을 책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가문을 심판하시겠다고 어린 사무엘까지 계시하셨지만 둔한 엘리제사장은 고치질 못했습니다.
그가 한 말은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다윗도 그랬습니다.
아들에게 쫒겨 기드론 시내 뒤편 동산으로 울며 도망가면서 못된 백성의 저주를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사울 왕께는 어땠나요? 죽일 수 있는 기회에서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이라면서 그를 살려주었고 그로 말미암는 고초를 수용했습니다.
수용하는 신앙이야 말로 깊이 있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과 그 은혜를 의심하지 않는 좋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기도 문제가 있습니다.
수용이란 이름하에 자칫하면 포기나 체념이 앞설 수 있으나
진정한 수용의 신앙은 환경이나 조건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포기나 체념을 이룹니다.
3)은혜를 알라
젊은 연인들의 사랑은 닭살은 돋아도 깊이가 없습니다. 좋은 것만 좋다고 합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노년의 부부들은 깊은 신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60세부터 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인생살이도 그렇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그 은혜를 알려면 세월의 무게감과 함께 추억도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경험과 실패와 성공에서의 믿음이 단련됩니다.
모세가 바로 왕 앞에 세움을 받았을 때에 그의 나이 80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떠나는 지시를 받았을 때에도 75세 였습니다.
결코 젊지 않습니다.
이 특징은 적어도 좋은 것만 좋은 것이다 하지 않고 현재만이 으뜸이다 하지 않습니다.
빌리그레험 목사는 올해 92세입니다. 현재 파킨스 병을 앓고 있습니다.
몸만 떠는 것이 아니라 아프기도 하고 간암, 당뇨, 신부전증으로 얼굴까지 퉁퉁부어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찾아와 보고 “목사님, 우리가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할께요.” 했을 때에,
목사님은 거부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 지금 이 상태에서 새로운 음성을 듣고 새로운 천국을 누리고 있다.”
젊은 제자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신앙입니다.
바울은 몸이 아팠습니다. 그 지병으로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는 줄 알아
사탄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3번 간구했더니 주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수용하는 믿음이 된 것입니다.
이 일이 그냥되질 않았습니다. 그의 회심, 선교실패 등을 통해 만들어진 은혜의 사건들입니다.
그러므로 수용하는 믿음은 은혜와 주를 아는, 신뢰하는 고상한 신앙입니다.
수용의 신앙에는,
은혜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은혜의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반응이 나온 것입니다.
주를 아는 성도들 일수록 범사가 은혜입니다.
전에는 좋으면 은혜, 나쁘면 재앙이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 은혜를, 전에는 기도의 응답, 혹은 당연한 결과라고 했는데 이제는 오직 은혜입니다.
은혜의 반응은 변화입니다. 오직 은혜를 아는 이들은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또 이들에게는 은혜가 또 오직입니다.
결론) 과일도 설익은 맛과 잘 익은 맛이 다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신앙은 더 확실합니다. 수용의 신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 뜻을 이루는데
유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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