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스를 향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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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는 불순종 선지자 요나를 보여줍니다.
요나는 본받지 말아야 할 신앙중 하나입니다.
1)요나의 사명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요약하면, 동사 3개가 등장하는데“일어나 가서 외치라”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듣고도 오히려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요나의 민족주의로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을 싫어해서 보담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였으니 아주 고의적인 반역입니다.
왜 여호와의 얼굴을 피했을까요?
여호와의 얼굴(히,paneb) 곧 ‘여호와의 현존’인데, 복잡하고 친밀한 경험으로 가득 찬 은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아기에는 눈의 초점이 서서히 잡히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이 얼굴입니다. 누구나 이때에 부모의 얼굴을 익히면서 자신을 알고 부모의 얼굴표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깨우치기도 하여, 부모의 얼굴은 사랑과 신뢰와 거절과 학대의 표준교과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 얼굴에는 광채가 나서 뭇사람들은 마주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얼굴을 본 사람들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 얼굴을 향해서 엎드려졌습니다. 그럼에도 그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관계의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요나는 어떤 이유인가요? 하나님의 현존을 부정하고 싫어하는 성도가 있을까요? 있다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일까요? 그럴리 만무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한갓 종교인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임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죽은 나사로에게도 임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위대한 능력입니다.
이런 성도이기에 이 말씀을 ‘소명’으로 듣지 않고 ‘사명’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소명과 사명은 작은 차이지만 실제에서는 큰 차이를 갖고 옵니다.
소명은 가슴으로 듣는 하나님의 음성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소명은 머리로 듣습니다. 환경이나 스스로 판단하고 인식하기에,
자기 뜻을 세웁니다. 중심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왜 요나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갔나요?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의 삶을 펼치고자 함입니다.
그렇다고 선지자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군 선교에 지대한 노력을 이루는 분과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들은 얘기로는 군목들이 좋은 부대를 선호한답니다. 진급하기 좋은, 도시와 근접한 지역의,
일반목사는 안그런가요? 소위 A급 B급 C급 지역이 있고 교회도 있는데
단독목회는 가급적 A급 지역에서 하길 바라고 부목사도 A급 교회를 선호합니다.
그 이유는 고생 덜하고 개척자금을 지원 받기 원함입니다.
교회를 세습 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작은 교회에는 세습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A급인, 왕국교회에서만 일어납니다.
이런 선지자 이런 목사들, 성도들에게는 선지자와 목사, 성도는 부담스러운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또 다른 명사를 붙이길 애씁니다.
2)노릇하랴
다시스는 솔로몬 왕 시대에 온갖 좋은 물품을 제공했던 풍요의 도시입니다.
왕상10장22절에 보면 솔로몬의 다시스선단이 금, 은, 상아, 원숭이, 공작 등을 실어왔다고 했습니다.
셈족의 언어와 문화 등을 연구하는 학자 고든(C,H,Gordon)에 의하면 다시스는 대중이 상상하는 “머나먼 낙원” 이었답니다. 이상형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비하면 니느웨는 사막을 지난 먼 땅입니다. 니느웨의 반대 형입니다. 스페인 쪽입니다.
고통과 천박한 땅이지만 소명을 받은 이들에게는 머물 땅이고 헌신할 희망의 지역입니다.
그렇다면 사명을 받은 이들에게는 고통이고 부담스러운 지역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외면을 합니다.
이 탓에 오늘도 소명 받았다는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겠지만 목적지는 직접 선택하겠다고 요구하며 다시스로 가는 표를 끊고자 욥바의 여행사를 기웃거립니다.
오직 자신들이 원하는 다시스에서 선지자로써, 목사로써 임무 수행을 하려 합니다.
일종의 절충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소원이 이루워지는, 그러나 여기서는 진정한 헌신을 이루지 못합니다. 지역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에 소명이 없기에 ‘선지자 노릇’하게 되고 ‘목사 노릇’할 뿐입니다.
이런 일은 선지자나 목사뿐 만이 아니라 많은 법조인, 의사, 교사 공무원인 성도들에게도 두루 해당됩니다.
그들 역시도 언제가 “일어나 가서 치료하라,” “가르쳐라” “섬겨라” 는 음성을 들었다지만 곧 소명이 아닌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일종의 착각인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된 점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삯이었습니다. 혹은 경력이고 영예였고 자기만족입니다.
여기에 종사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한갓 ‘노릇’하는 이에 불과 할뿐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도 피했는데 그 무엇을 섬김이 있겠나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가 2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강조 아닌가요?
3절)~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3)준비된 대풍
모든 사람이 다 소명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명자를 소명자로 세우고자하실 때에 하나님은 그를 흔드십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때에 만난 태풍과는 본질이 다릅니다.
그 유라굴라 태풍은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종임을 선포한 태풍이었다면 요나가 맞이한 대풍은 요나의 심성과 신앙을 깨트리는 강력한 태풍입니다.
이 대풍은 옛사람이 죽어야 끝납니다.
12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15절)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요나 속에 있던 정욕, 자기사랑, 성공 목회나 사업 등,
하나님을 거부한 불신앙이 송두리째 장사되었습니다.
요나는 잠시잠깐을 겪었지만 사람에 따라 기간도 대풍의 강도도 다릅니다.
이런 경우 대다수 이유를 모릅니다, 더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소명자로 택함 받은 이는 이때 어렴프시나마 압니다.
12절) ~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아노라
요나는 준비된 물고기 뱃속에 갇혔지만 사업실패요, 건강이상이요. 좌절의 연속입니다.
여기서 요나는 두 가지를 배웁니다. 애가와 감사입니다. 시편의 진정한 기자가 됩니다.
애가는 슬픈 탄식입니다. 죄와 자신에 대한 통탄입니다.
욘2:5)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감사는 주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환희요. 고백입니다.
욘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았나이다
소명는 이토록 만들어 집니다.주의 음성을 들었다고 즉시 이루워지지 않습니다.
쉽게 만들어진다고 여기시나요?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서둘르지 않습니다.
모세는 80년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종종 주의 사역에 관심을 갖는데 비해 주는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12제자들을 부르심이 전도 사역보단 함께 있기를 원하심이 앞섰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빨리 소명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스 보단 니느웨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비결은 ‘여호와의 얼굴’을 즐거워 할 신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바다에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대풍이 없기를 기도했나요?
얼마나 배가 깨지 않도록 기도했나요?
우리는 얼마나 건짐 받기를 사모했나요?
하나님의 얼굴은 피하면서 말입니다. 은혜만 생각했는데 그 은혜도 고작 내 생각에서만 머무는 은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애가가 그쳤습니다.
애가가 없던 감사는 영혼 없는 감사로 전락했습니다.
요나에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탈북청소년을 교육하는 여명학교가 있습니다. 그 교감은 젊은 여성입니다.
이주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 일하다가 신혼여행을 중국으로 갔습니다. 같은 버스에서 탈북자노인이 공안에 잡혀 끌려가는 것을 보고 계속 중국에 머물며 탈북자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가난을 끊은 일은 교육이다.” 탈북청소년 교육을 매진하고 있습니다. 소명입니다.
그가 소명을 이루기까지 그녀의 길은 험난했습니다. 가난한 집의 딸로써 고생을 했습니다.
막걸리 집을 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가난을 체득했고 주변사람을 대접하는 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일에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보람이 큽답니다.
결론) 소명자는 언제나 작아도 울림은 큽니다.
소명은 시대와 상황을 뛰어넘는 주의 유전자인 사랑과 용기를 머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스로 향하는 신앙은 그릇된 신앙입니다. 니느웨를 향하는 신앙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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