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느웨를 향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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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선지자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소명으로부터 도망간 선지자,
자신의 목적을 위한 사명에서 실패한 선지자,
곧 하늘이나 땅에서도 설 곳 없는 선지자요. 엉망진창의 신앙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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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요나를 하나님은 바다의 폭풍과 물고기 뱃속에서의 역경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본래의 요나,
소명을 감당하는 “요나가 되라” 하심입니다.
1) 두 번째 은혜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임했습니다.
욘3:1~2)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기에 똑같습니다.
일어나, 가서, 선포하라
저들이 듣고 않듣고는 상관말고 “선포하라” 하심입니다.
듣고 고치면 회개요 구원이지만, 듣지 않고는 회개도 구원도 심판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도 심판도 하나님의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롬10:14~15) 그런즉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우리 신앙의 궁극은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빛이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향기라”
소명은 분명합니다.
사명은 소명하고 좀 차이가 있습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아닙니다.
인술을 베푸는 의사와 의술을 베푸는 의사와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의사가 의술을 베풀고 돈 받지 않으면 인술입니다만 처음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사람치료냐? 치료비냐? 무엇이 목적이냐? 다릅니다.
목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곡식을 떠는 소에게 멍에를 씌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일하는 소일지라도 제 먹을 것은 당연한 노동의 댓가입니다.
목사의 사례비, 정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사례비 때문에 목회한다면 똑똑하고 분명한 것이 아니라 ‘삯군’이 됩니다.
이 소명은 의대나 신대원을 나왔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 설령 주신 마음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즉시로 니느웨에 가서, 진심으로 선포하든, 섬기든이 되지 않습니다.
소명자라도 문제 많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진위를 논하는 재판정에도 악이 있답니다.
사도행전 24장을 보면 재미난 사건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있는데 벨릭스총독이 자기부인과 함께 사도바울을 자주 만났습니다.
이유가 뭔지 아시나요? 원통함을 풀어줄려고요? 성경을 배울려고요?
행24:26) 동시에 도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 하더라
죄가 육신의 정욕을 부추키고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자랑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2) 창조의 하나님
소명을 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창조의 하나님 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방관하거나 침묵하지 않으시고 삶에 개입하셔서 주신 소명이 하나님의 소명이도록 폭풍으로 흔드시고 그 알량한 사람의 편견과 스스로 세운 사명을 깨트리고 또 거듭나게 하십니다.
3장은 순종하는 요나를 볼 수 있습니다.
욘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라
이 요나의 선포로 니느웨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를 보십시오.
욘4:1~2)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화가 났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이든 환경이든 상대방이든, 뭔가 잘못된다는 반증입니다.
마지막 장인 4장에서만 무려 ‘화’라는 단어가 6번이나 나옵니다.
심지어는 요나가 볕을 가린 박 넝쿨이 벌레로 먹혀 마르자 또 화를 냈습니다.
얼마니 화가 났던지 하나님이“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하셨을 때에
요나는 ‘옳다 뿐인가요? 저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하는 지경에 미쳤습니다.
이 화, 보통 상대방이 잘못해서 내게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요나는 하나님 이었습니다.
요나는 왜 하나님께, 소명을 주신 하나님께 화를 냈나요?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사랑한 박 넝쿨이 벌레에게 먹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소명은 여기서 진위가 들어납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선포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달성도 아니었고 니느웨의 구원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폭풍이 싫고 물고기 뱃속의 역경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포하는 일을 건성으로 했습니다.
니느웨성은 3일을 돌아야할 큰 성이었지만 요나는 1일 만에 마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욘3:4)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그러므로 니느웨 성의 구원은 요나가 선포했기에 구원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였습니다.
요나가 소명이 있었다고요? 건성으로 선포했는데?
구원받은 사람들을 보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화를 냈는데도?
자기에게 구원을 이루는 소명을 주신 하나님께도 화를 냈는데도?
화는 소명을 진단하는 확실한 청진기입니다.
거룩한 목적과 충성을 다했는데도 화가 신앙 속에 있다면 아직은 진정한 소명이 못된 것입니다.
종종 화가 나지 않나요? 아직도 내겐 있습니다.
“거룩한 주의 뜻을 이루워 보겠다는데?” “왜?”
3) 소명자
진정한 소명은 1일이나 3일을 돌며 외치는 행위가 아니라
*소명을 주신 분의 마음을 아는 일입니다.
요나가 주의 마음을 알았다면 3일 길이 아니라 끝까지 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하고 경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화만 충만했습니다.
욘4:10~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흔히 “철난다.” 하는 경우 그 마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세배하는 까닭은 세뱃돈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세배는 공경입니다. 철난 것이지요.
신앙의 철남이 곧 소명입니다. 그 사람이 소명자입니다.
*이런 소명자에게는 화가 없습니다.
있다면 자신에게 있습니다.
“은혜 입은 내가 왜 이래?” “천사도 흠모하는 내가 왜 그래?”
*그리고 감사가 있습니다.
주께 쓰임 받는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여기서 “죽기까지의 충성‘이 자발됩니다.
행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결론) 니느웨를 향한 신앙은 고급신앙입니다.
우리 신앙은 천국을 향하는 고급화일수록 땅에 사는 동안에는 오히려 저급화를 이룩합니다.
세상에서 각광받는 다시스 보다 생각조차 못하는 니느웨를 보고 느끼며 찾게 됩니다.
추석을 맞이하면서 니느웨 성읍민을 권념합시다. 주가 가리킨 니느웨를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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