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서야 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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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살피면 시대마다 마디가 있습니다.
철학 시대가 있었고 르네상스 시대도 있었습니다.
공자, 맹자, 노자와 같은 사상가가 활동하던 고대중국은 춘추전국시대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업화시대에는 이공계가 인기였습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모양을 갖추던 시대가 있고 본질을 추구하는 시대가 있습니다.
1) 경건의 모양과 능력
초대교회는 모양이 갖추지 않던 시대입니다.
생명, 곧 능력이라 할 수 있는 본질이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덧 모양이 갖추어지니 본질이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학교를 갔지만 세월이 지난 후 아이가 커서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병원으로 모시는 경
우와 흡사합니다.
모양과 능력은 다 중요합니다.
서로를 보완하는 유기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관계가 끊어진 체 생명이 없거나 작은 체 모양이 앞서면 판단에 오해가 옵니다.
진정한 어른인 경우 몸만 크거나 늙어서가 아닌 경험이나 관계가 크고 완숙해야 합니다.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몸은 커서 어른인데 정신이나 마음은 걸맞지 않으면 어떨까요?
병이고 장애입니다. 주변으로 하여금 혼란을 부추 킵니다.
어른으로 대하여야 하나? 아이로 대하여야 하나?
교회나 신앙이 이럴 수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선교 130년을 맞이하는데 어린아이 교회인가요? 어른 교회인가요?
예수 믿는 신앙력이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에 모든 의로움과 진실함과 거룩함이 없다면 어떤 신앙인가요?
경건은 모름지기 집에서 키우는 동물에게도 사랑이 주어져야 합니다.
전에는 그렇지 못했지만 예수 믿은 후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되었다면 거래는 진실 되고 사람들에게는 친절하여 삶의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체 믿는 모양, 흉내만 붙들고 있다면 어떨까요?
옛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기도하며 별난 옷을 입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종교적이었는지요? 삶은 없었기에 껍데기 신앙이었습니다.
세상사는 돌고 돕니다.
유행만 돌고 도는 일이 아니라 신앙도 돌고 돕니다.
말세의 특징이 바로 이 껍데기가, 모양이 아주 중요하게 인정받는 시대입니다.
신앙으로는 쇠퇴기인 셈입니다.
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
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
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며, 하겠나요? 본질에서 이탈된 심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실력보다 스펙중심이요. 인품보다 성형미를 더 쳐주는, 보이는 가치추구 때문입니다.
물론 능력, 본질, 생명. 실력, 인품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겪어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광받지 못합니다. 시대의 유물로 치부했습니다.
반면 모양은 LTE 시대라서 점점 신속하며 확산하기를 더합니다.
다른 말로 사람중심의 사회가 아니요. 물질중심의 사회가 된 현상입니다.
이 탓에 누가 고통을 당하나요? 다름아닌 사람 아닌가요?
2) 경건의 모양
이 경건의 모양이 기독교회에도 고스란히 들어왔습니다.
예배당은 아방궁이 되었는데 기도는 그쳤고 사랑은 실종되고 다툼만 있습니다.
이런 교회가 허다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예수그리스도요. 그 보혈이요. 천국이요. 성령이 능력 아닌가요?
그럼에도 친교는 증가하면서도 예배와 기도는 생략되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가 성경과 찬송가를 개정했습니다.
성도들을 좀 더 확실한 진리로 인도하겠다는 취지입니다.
문제는 성경책과 찬송가를 바꾼 후에 성도가 무관심하다면 어떤 걸까요?
오래전 해외에서 겪은 일입니다.
성회를 마치고 난 후 할머니가 찾아왔습니다.
내가 사용하는 가죽 성경책을 달라고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종이 겉장의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경건의 능력이 아닌 모양을 구했던 것입니다.
조화에는 꿀이 나오지 않습니다.
액자 속의 불은 뜨겁지 않습니다.
그려 논 맹수는 동물이 도망가질 않습니다.
능력이 없는, 본질을 놓친 신앙은 자신은 물론 주변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모습에서 돌아서라, 그 곳을 떠나라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정들고, 전통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린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는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있게 하자 하면서 개혁이나 혁신을 주창합니다만
유감되게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주의 성령만이 새 창조를 이루시고 능력을 이루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37:5)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언제나 죄의 소굴이 됩니다.
방금도 에스겔서를 인용했지만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당시 제사장들이 죄악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제사장이 무엇하
는 직무자인가요? 성전에서 제사하는 직무자입니다만 그들이 하나님 두렵게 여기지 않아 망령된 일을 자행했습니다.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
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겔22:26)
이런 일은 옛 이스라엘만 있을까요? 현대에는 없을까요? 우리나라에는 없을까요?
“퀘바디스”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요” 영화제목입니다.
최근 이 제목을 본뜬 다큐영화가 만들어졌나 봅니다.
유튜브에서 예고편을 보았는데, 착잡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사회에 문제를 일으킨 목사들을 고발한 내용이었습니다.
헌금횡령, 세습, 사기, 배임, 성폭행 등, 모두가 사회법정에서 유죄판결 받은 목사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목사들이 여전히 목회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비정상을 그곳의 교인들은 정상으로 간주하며 떠나지 않고, 비판하는 이들을 비정상으로 치부하여 오히려 옹호하고 있
는 상황입니다.
제사장이나 목사도 실수는 물론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숙해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생략된 체 목회하거나 임지만 바꾸어 여전히 목회한다면 한국교회는 상식을 넘은 것입니다.
이때 따르는 교인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실성한 것 아닌가요?
개인적으로 생각의 전환점을 이룬 일이 있었습니다.
역시 해외였습니다. 영업용 택시가 티코 같은 차에서 프라이드로 교체되는 싯점인데,
난 티코 같은 택시를 이용하고자했습니다.
옆의 프라이드가 와도 거부하니 현지 목사님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왜 거부하시나요?” “영업이 힘들 작은 차를 타려고요” 그때 목사님은 “그러지 마세요. 타지 않아야 영업이 않돼서
빨리 차를 교체합니다.“그가 옳았습니다.
그후 불친절하거나 비싸거나 불량하면 이용하질 않게 되었습니다.
개선의 여지를 만드는 동기를 부여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분별력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파국을 이루게 합니다.
이 현상이 한국교회를 저하 시킨 주요인입니다.
3) 경건의 능력
경건의 능력은 지혜에서 옵니다. 지혜는 주님입니다. 영안이 밝아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향하여야 합니다.
보이는 모양이나 의식이나 껍데기에서 보이지 않는 참 하나님께 돌아서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경건의 능력이 없을수록 자꾸 모습이나 모양을 개량하려 합니다.
점점 더 종교적이며 더 거룩을 모방하려 합니다.
천주교의 제단을 보십시오. 금칠로 화려하지 않나요? 사제들의 복장을 보십시오. 붉고 흰, 발목까지 오는 복장으로 꾸몄습
니다. 그들의 성당을 보십시오.
온갖 성물과 형상물로 치장했습니다.
여기서 벗어난 기독교가 이젠 그 모양을 따라합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리로다 시2:4)
탈무드 나온 말입니다. 가겟집 영감이 유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보, 어디 있어? “나 여기 있어요” 딸은 어디 있어? “아빠 나도 여기 있어요” 그래? 그렇다면 가게는 누가 보냐?
본질을 잃은 모습 아닌가요?
결론) 우리 신앙의 본질은 주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근거합니다.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기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 했습니다.
모양보다 이 믿음 안에 머물도록 힘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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