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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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선지자는 어느 날 시험에 들었습니다.
세상을 보니 꼭 하나님이 아니 계신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에도 어찌하여 강포가 있고 간악과 패역이 있는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은 어디에 있는지? 회의가 들었습니다.
1) 참신자의 고통
이런 회의는 욥에게도 찾아왔습니다.
악인들이 득세하며 그 자녀들이 형통하고 저들은 죽을 때에 고통도 없이 죽는데 비해,
무릇 경건하며 옳게 믿는 신자에게는 고난이 등짐처럼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참신자의 고통은 이럴 때 옵니다. 가난과 고난 자체가 아니라
어찌하여?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계시는가? 하나님에 대한 궁금함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욥은 이 답을 알기 위하여 몸부림쳤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나아가 답을 원했습니다.
합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이 답을 현대인은 성경을 보아야 됩니다.
성경을 보지 않고 각종 설과 이론을 따르며 판단하는 일은 어리석습니다.
성경은 하늘의 정사도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경우 천상의 회의에서 이 모습을 계시했습니다.
물론 지상의 욥도 몰랐던 사안인데,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신비입니다.
왜 하나님이 계시는데 공의가 굽어지고 악인의 심판은 유보될까요?
왜 경건하게 살고자할수록 고난의 잔을 마시며 고통을 겪어야 할까요?
사탄의 참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대적자입니다. 또한 공중의 권세를 잡고 다스리는 자입니다.
이런 사탄이 하나님께 욥을 참소했습니다.
욥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하여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탄에 대한 이원론적인 지식체제를 갖고 있기에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도 하나님에 의한 여하한의 방편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탄도 때론 사용하시어 원대한 통치를 아직 이루고 계십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지 않도록 보이기도 합니다.
무고한 고난이 있고 엉망진창의 삶이 있는 이유입니다.
예로 야당은 여당의 대적과 참소하는 정당으로 비췹니다.
그러나 야당도 국가에 필요한 정당인 이치와 같습니다.
오래 참으심입니다.
심판의 때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즉결을 원하시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헤롯왕의 경우 즉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가나안의 7족속의 경우처럼 죄악이 찰 때까지 기다리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궁극으론 심판하시기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확실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성도를 연단하십니다.
무고한 희생을 당하신 십자가의 주를 깨닫게 하고 그 고난의 이해와 사랑에 동참시키십니다.
또한 이 고난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너무 작게 여기고, 너무 의인화시키며, 개인화 시켜서 판단하고 이해하며 믿으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이 하나님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주를 6일 만에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이기적인 하나님이며 편협된 하나님이며 독선적인 하나님입니다.
내게만 맞추어진 하나님이 하나님이겠나요?
하나님은 이곳에도 계시지만 온세상에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만인이 복음을 믿고 구원 얻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손가락질하며 악인이라는 사람들까지 사랑하십니다.
나의 아버지이시지만 우리의 아버지가 먼저 되신 까닭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바른 지식이 바른 믿음을 이루워 경외하게 되고 떨게 되며 이해하지 않는 세상에서 소망의 인애를 비로써 갖을 수 있습니다.
2) 잠잠할찌니라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달라졌습니다.
합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잠잠할찌니라
어찌하여? 하며 탄식하던 그가 “온 천하는 잠잠할찌니라” 했나요?
하나님을 재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합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즉 “하나님을 새삼 알았습니다.”의 고백 아닌가요?
의심과 의구심으로 가득 찬 체 불평과 원망으로 치솟던 선지자가 스스로 입을 다문 것입니다.
여기서 교훈이 있습니다.
대충적인 성품 보다는 탐구하며 때론 회의적인 신앙이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지 말고 오직 생각하라”는 경구가 신앙적입니다.
신앙에 회의를 가지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을 지니십시오.
탄식과 고통을 지닐 만큼 몸살을 하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하나님께 나가십시오. 성경에 꽂히십시오.
마침내 하나님의 해답과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합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이 경이로움이 신앙의 전환점이 됩니다.
고백과 찬송과 감사와 헌신이 반석이 됩니다.
그 후의 모습을 보십시오.
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3) 여호와를 인하여
선지자의 마음은 온통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번영신앙은 하나님이 은혜주신, “~ 때문에” 믿고, 감사하며, 그리고 더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머무는 참신앙은 “비록 모든 것이 없고, 없고, 없으며 다 없을지라도~”
가난하고 고통을 당해도,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합니다.
얼마나 다른지요?
여러분은 어떤지요? 않되고, 잃고, 재위에 앉고 주변에서 조롱을 받아도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 할 수 있나요?
그 안의 소망을 아나요?
도무지 기뻐하거나 감사하지 못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우상숭배자들입니다.
허무한 것들을 근거 없이 믿으니 늘 허망하고 허탈할 뿐입니다.
이들은 거머리처럼 다고다고만 합니다.
주신, 받은 바에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자가 못됩니다. 받은 바는 망가지고 퇴색되며 줄어들 때 기쁨과 감사도 함께
떠나버립니다. 겉치레 신앙입니다.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죽었다가 산 신앙이고 회의와 어둠속에서 광명을 되찾은 참신자입니다.
그들의 고백은 한결 같습니다.
합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을 다니게 하시리로다
막연하지 않고 확실하며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뵙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어릴 때는 무조건 자기본위입니다.
떼쓰는 일만 있습니다.
좀 더 크면 타산적입니다.
부모에게 조건을 걸어옵니다.
심부름하면 얼마? 점수 올리면 무엇을?
더 장성하면 부모의 은혜를 헤아립니다.
이러면서까지 키우셨나?등
그 자식도 늙으면 부모로 인하여 눈물이 납니다.
이쯤되면 인간완성이 되었으나 부모는 곁에 없습니다.
결론) 오늘은 올해의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개인들로는 거둔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럼에도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리라” 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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