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있는 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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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향을 구분하는 방법이 여럿 있습니다.
혈액형, 체형, 그리고 에너지 집합형,
에너지 집합형은, 그 사람의 에너지가 어디로 집합되느냐가 관건입니다.
머리에 있는 경우, 제갈량형이랍니다. 가슴에 있는 경우 유비형이고, 장에 있는 경우는
장비형이랍니다.
제갈량은 지략가입니다. 이런 성향은 사상가, 교수 등이 직업으로 합당하고 쉬는 방법도 사색이나 독서 등이랍니다.
유비는 덕장인데 가슴이 가는 데로 움직이는 성향입니다. 예술가나 성직자나 창조적인 일을 직업으로 가지면 되고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힘을 얻는 답니다.
장비는 무장인데 몸과 힘이 움직이는 성향입니다. 체육인 등이 직업으로 가져야 되고 먹고 뛰어야 힘이 보충된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향인가요?
1) 주님이 사용하시는 경건한 사람들은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땅을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지략가는 아닙니다.
이 때 생각했더라는 구절이 없습니다. 몸이 가는 데로 행동한 듯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학문과 학술을 다 배웠습니다.
다윗은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신약을 보면 베드로와 바나바는 아브라함 같습니다. 가슴이 따듯한, 혹은 넓은,
바울사도는 논리적이었습니다. 스승을 판 가롯유다도 모세과 인 듯합니다.
누가는 의사였지만 바울사도와 전도 여행을 함께 한 것 보면 의사라지만 체력이 바쳐준 장비과 인 듯합니다.
사람의 성향을 딱 꼬집어 말 못하는 것은 복합적이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교육과 신앙 따라 변화도 갖기에 이러가 싶으면 저렇고 저런가 싶으면 이래서
자타가 피곤한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이 다른 성향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성향이니 성숙할수록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의 탄생에 경건한 믿음의 사람인 요셉과 마리아가 부모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향일까요?
마1:19~20)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내와 합방하지 않았는데,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 흥분하거나 행동하기 보단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이유와 조치를 구상했던 것입니다.
그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어쩌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로뎅의 작품이 여기서 나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리아는 어떤가요?
눅1: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역시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천사가 나타나 “은혜를 받은 자요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부의 공통점은 경건함 외에, ‘생각하는’ 같은, 유형의 성향이 있었습니다.
현대는 정보는 많아도 생각이 없습니다.
특히 기독신앙 안에도 믿음, 열정, 비젼, 꿈 등은 많아도 ‘생각’이라는 단어는 희구합니다.
들어보셨나요? ‘생각하시오“를,
“믿음을 가지세요” “열정을 품으세요” “비젼을 가지세요” “꿈을 꾸세요”와 비교해 보면 알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신앙은 머리보단 마음이나 힘에 의존한 신앙이었습니다.
감성에 치우치고 힘에 의한 신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성과 부합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무턱대고 믿은 결과 그 좋았다던 믿음은 고난 앞에서 사상누각이 되고,
힘으로 밀어부쳤던 열심적 신앙은 이단의 공격에 우르르,,추풍낙옆처럼 교인 감소현상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왜 머리를 위에 가슴을 중간에 장은 아래에 두었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 후 가슴으로 느껴야 내 신앙이 되고
마침내 내려가서 몸이 움직여야 힘이 나옵니다만 우리는 머리를 뺀 신앙이었습니다.
겨울의 진미인 동태탕은 머리와 내장을 넣어야 제 맛입니다. 또 먹을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다수는 버립니다. 꼭 이런 형국입니다.
머리를 써야 합니다. 머리부터 믿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믿지 말고 오직 이해하라”입니다.
그리고 가슴이 그리고 삶의 실천입니다.
그렇지 못하니 매일 다짐이나 각오를 해도 실천을 못하는, 입만 산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2) 구주의 성탄을 머리로 이해해 보십시오.
구주의 성탄이 즐거운 날인가요? 왜 세상은 열광할까요? 왜 절마져 거들까요?
성경에는 즐거운 성탄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속의 사람들이 만든 문화 분위기입니다.
성경적의미의 분위기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이고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입니다.
구주성탄의 즐거움과 기쁨은 비슷해도 다릅니다.
기쁨(喜,희,joyful)입니다. 즐거움은(樂,락,merry)입니다.
기쁨이 있어야 즐거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기쁨 없는 즐거움은 유흥입니다. 기쁨과는 다릅니다. 복음은 기쁨의 근원입니다.
사실 교회가 기뻐한다면 세상은 탄식해야 합니다만 언제부터 교회와 세상이 한통속이 되었나요?
그러므로 교회만 기뻐해야 합니다. 아니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교회를 기쁘게 하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왜요? 그 보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이 화목, 평화가 기뻐할 이유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감격이고 예정된 공격의 공포에서 갑자기 평화로 전환된 국면의 해방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 기뻐함이 없습니다. 오직 즐거워야한다는 부담과 더불어 머뭇거릴 때에,
세상은 흥청망청의 즐거움으로 온 나라가 소비와 온 국민이 술 취함에 빠지고 있습니다.
3)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처럼, 참으로 내 삶에 주님이 거룩한 구세주로 과연 계시는가?
마리아처럼, 과연 주님이 나를 통해서 세상에 오실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 캐럴을 듣고 선물을 보내고 받고 하는 일등은, 한갓 즐거움의 일일뿐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못하고 내게 평화는 고사하고 오히려 짜증과 잘못하면 죄만 짓는
성탄이 되기 십상입니다.
더 생각하기를, 왜 세상은 그처럼 평소에는 예수를 거부하면서 성탄절은 즐거워하나?
왜 예수가 이 세상에 계시는데 여전히 어두운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는 마귀에게 속고 있습니다. 성탄이라 해서 가난한 이웃을 도와야 되고 성탄이라 해서
탄일 찬송을 부르려한다면,
요셉은 생각만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에 믿음이 미치자 행동했습니다.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1:24~25)
생각 없는 행동은 사태를 그릇 치지만 역시 생각만 해서는 아무런 변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더욱이 즐거움은 느낌입니다. 느낌만 따라가면 마귀가 주는 먹이를 먹는 일입니다.
성탄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날이 아닙니다.
않하던 일을, 무언가 해야 하는 때도 아닙니다.
구주 앞에 올바른 고백과 찬송과 예물을 드리기 전에, 생각이 깊어야 합니다.
“참으로 나는 주의 은혜를 입은 자인가”
“내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태동하고 있는가?”
“무턱대고 괜스레 좋아하고 열광하는 저들은 어찌되는가?”
생각했던 마리아는 처녀가 잉태를 하면 돌에 맞아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눅1:38)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고백을 듣고 요셉으로 하여금 그녀를 보호하시기 위해 마리아의 잉태를 전하게하셨고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왔던 것입니다.
뵈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사람들 보다 더 나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들은 말씀을, 과연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상고했기 때문입니다.
깊은 생각, 더 나은 믿음의 시초가 됩니다.
결론) 요셉, 마리아의 생각이 주효하니 그들의 믿음은 크게 행동될 수 있었습니다.
무조건 믿기 전에 생각하십시오.
까치도 먹이사냥에 도구를 사용합니다.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물며 사람이 생각 없이 믿거나 경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의로움과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고져 오셨음을 생각하시고 믿으십시오. 성탄의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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