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과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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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 기독교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광야의 야성을 회복하자” 입니다.
일종의 안주보다는 도전을 주문하는 모습인데,
교회도 안정을 위주로 치닫고 목사도 모험보다는 안전위주로 가기에,
도전과 모험의 새 패러다임을 이루자는 함의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아니 앞설 것이 있습니다.
곧 기독교 영성입니다.
1)기독교 영성
영성은 영적 성향을 의미합니다.
육신만 아니라 영혼을 중시하는, 현재만 아니라 영원의 개념도 포함됩니다.
심지어 모든 사물에는 정령이 있다는 정령사상도 영성인데
예로, 동네 입구의 오래된 느티나무에 정령이 깃들어 있어 마을을 지킨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은 주님의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현대의 최고와 최대의 으뜸사상과 대치됩니다.
그 대표적인 성품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셨고 종의 모양으로 십자가위에서 죽는 일이라도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능력부족의 체념이 아니라 이 모든 능력과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믿었기에 이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마치 소년 이삭이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믿었기에 묶였고 그 아버지가 칼을 뽑아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그 순
간까지 잠잠했던 이치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도전과 모험을 불사하는 일 외에도, 맡기며 자신을 포기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믿기에 도전하고 모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잠잠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서, 10지파의 대표들이 반대하여도 “올라가자 이기리라” 하였습
니다.
그러나 모세는 홍해 변에서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14:13)” 했습니다.
다 맞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현대 믿음의 오해는 꼭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고, 그 어떤 성과가 그것도 탁월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사로
잡혀 잠잠할 줄 모릅니다.
자동차는 잘 달리기만 해서 곤란합니다. 잘 멈추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두 기능을 효과적으로 이루고자 엑셀과 브레이크가 함께 있습니다.
맞습니다. 지난날에는 척박한 불모지에서 야성을 발휘하여 주야로 질주했다면, 그래서 이 만한 국가의 발전과 교회의 부흥
을 이루었다면 이제는 주의 마음을 품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잊은 것은 무엇인가? 성찰하며 본위를 되찾아야 합니다.
받는 국가나 교회에서 이제는 주는 국가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은 목마르다” 한다면 기갈 증에 걸린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자족이 없으면 신앙은 허약해집니다.
지금의 문제는 가난해서가 아니라 부유해서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믿어서가 아니라 잘못 믿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본래의 성품을, 예수님의 마음을, 온유와 겸손을 되찾아 지켜야 합니다.
2) 구체적으로
온유와 겸손은 구체적으로 할 때와 말 때를 구별하는 지혜의 성품입니다.
모세는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더라” 했습니다.
주님도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워라“ 하셨습니다.
모세의 경우, 선천적인 성품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터득한 성품이 온유입니다.
어쩌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의 성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의 감동이나 뜻이라 여겼는데, 그럼에도 아닐 수 있습니다.
반면 결과에 상관없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를 아는 일, 그리고 여기에 합당한 처신을 이루는 지혜의 능력이 온유입니다.
모세의 경우, 젊어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냥 믿고 행동했다가 “네가 우리들의 법관이냐”는 핀잔을 들었고 사람을 죽
이는 사고도 냈습니다.
그 후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 생활을 하다 “민족을 구원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만 이때는 사양했다가 하나님의 책
망을 들었습니다.
다 온유의 부족이요, 결국 터득하는 과정인 셈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떨까요? 오직 주님만이 신성이 충만하여 이 성품을 온전히 지니셨습니다.
겸손은 무엇인가요?
타인의 대한 배려와 긍휼과 자비가 있는 것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부족함을 인지한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런 타입이었습니다. 또한 대다수의 하나님의 종들의 모습이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해야 합니다.
“나와 같이 하여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저
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전10:33)”
온유와 겸손이 있다면 어떨까요? 어디든 화평이 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가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빌2:2~3)“
어떤가요? 최고니 최대니 하는 싸이즈나 실속은 없어도 평판은 최고가 되겠지요?
신앙은 실속을 얻거나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 영성은 오히려 물질적이고 물량적인 지향성을 배제시킵니다.
오직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도다”함을 이루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영성은 물론 야성을 잃었다는 것은, 세상보다 못나고 기업보다 떨어지고 직장인 보다 치열하지 못하다는 자성입
니다.
물건 만들어 파는 이들을 아실 것입니다.
직장인들의 치열함도 아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은 세상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 도전과 치열함이 어디 있나요?
편안함을 주는 신앙을 추구합니다. 위로 받고 싶기 때문이랍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드림과 같은 절실함은 어디 있나요?
목회자들조차 채용되고자 안정된 곳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야성이 있을리 만무입니다.
그러고 보니 영성도 없이, 맛 잃은 소금되어 거리에서 밟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3)황금비율
야성과 영성을 회복한다면 이것도 옳고 저것도 있어야 합니다.
맛있는 음식의 비결은 좋은 재료와 황금레시피에 있듯이 기독 신앙은 이래야 합니다.
“황금비율은 수학 용어입니다.
선분(線分)을 크기가 다른 두 부분으로 나눌 때
긴 부분과 짧은 부분의 비를
전체와 긴 부분의 비와 같게 했을 때의 비는
일반적으로 약 1.618:1이라고 합니다.
수학의 이 이론 공식은
정사각형에서 시작하는데,
카메라의 규격필름(24×36mm=5:7.5)의 비율과
거의 가깝습니다.
이 황금 비율은 옷차림에도, 사람의 몸매에도,
자연의 들과 산의 구도에도, 건축에서도,
황금비율이 적용될 때 보기가 가장 좋습니다.
이 황금비율의 공식에 따라 만들어진 작품은
가장 안정적이고, 가장 편안해 보이고,
가장 조화로워 보입니다.
그래서 황금비율은
많은 예술가나 화가들의 암묵적 기준입니다.“
이 비율이 신앙에도 합당합니다.
광야가 하나님을 뵈옵기가 최적지임을 믿나요?
그 광야에 나가서 떼굴떼굴 구룰 수 있는 용기적 믿음이 있나요?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멈추고 내 안에 심겨준 주의 마음을 갖고, 사람들을 만남의 삶속에서
온유와 겸손을 이루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는 신앙보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먼저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에게 교회 다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다니는 일은 종교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느냐 묻습니다.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에게 좀 더 진보된 질문으로 묻습니다.
여러분의 삶속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나요? 인격이고 생활입니다.
결론) 신앙의 야성은 전투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주님다움이 참 야성입니다.
큰 예배당에서 안정을 누리며 믿는 신앙에서 벗어나려는 야성이라면,
일찍이 주의 마음을 품어 기독교적인 영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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